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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펑크 AU/스토리

[스팀펑크] 1화

1. 시계 속에 들어있는 건 태엽 만이 아니지

갓 떠오르는 주홍빛 태양은 이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자연의 흔적이었다. 길바닥 블럭을 뚫고 나온 풀은 마차바퀴에 금방 짓눌려버렸고 도시 끝에 붙어있는 바다는 정박한 배들에 가려 검게만 보였다. 하늘 위는 언제나 회빛이었고 간간히 녹슨 파이프들이 눈에 띄었다. 녹음이 우거진 숲이나 흰 눈이 무릎까지 덮인 설산의 풍경은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했다. 이 도시에서 그나마 닮은 것을 찾는다면 노란 모래알갱이들이 흩어지는 사막이었다. 모래알갱이가 아니라, 버려진 고철조각들이라는 건 좀 달랐지만. 그리고 그런 풍경도 중심구역에서는 거의 볼 일이 없었다. 고철사막은 기타 구역이라고 대충 뭉뚱그려 분류되는, 도시 맨 외곽에나 존재했다. 그 틈에서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들 중에 연금술사와 마법사들이 숨어서 언젠가 도시의 주인이 될 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오래된 괴담이다.

잠뜰은 이런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것도 시장구역과 가까
워 살기 편한 중립 A구역에서. 별 탈 없이 성인이 되어 별 탈 없이 등록을 끝내고 시장구역에 들어섰다. 잠뜰이 할아버지를 따라 시계점을, 정확하게는 시계 수리를 전업으로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잠뜰의 부모는 차라리 기술구역에 가서 연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잠뜰은 시계 수리공을 선택했다. 왜 시계를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이 구역에서 가장 재미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인공적이면서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사람이 만들어 고쳐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주제에, 세상에서 가장 자연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잠뜰의 부모는 더 말리지 않고, 너희 할아버지께서 시계점을 할 때 늘 가지고 계셨던 거라며 금색 태엽 하나를 건네주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속에서 시계는 필수품이었다. 단순한 시계점은 있었지만 수리를 해주는 곳은 없었다. 수리해주는 것 보다는 새 것을 파는 게 돈이 더 잘 벌렸다. 사람들도 굳이 낡은 것을 얼기설기 고쳐가며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잠뜰의 '하늘고래 시계점'이 문을 열었다. 문에는 항상 <시계 수리 전문>이라는 공지문이 붙어있었다. 왜 애초부터 시계 수리점이라고 팻말을 붙이지 않았냐면, 그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아 등록하기에 상당한 금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먼저 수리점이라는 이름을 등록했다면 좋았을 것을. 이미 하늘고래라는 단어를 등록하는 데에도 지출이 컸기 때문에 잠뜰은 그냥 시계점이라는 이름에 만족하기로 했다. 시장구역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늘고래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시선이 끌렸고, 이내 새 시계를 살 돈이 없는 외곽 지역 사람들을 필두로 소문이 퍼지다가, 시계에 얽힌 추억을 차마 버릴 수 없던 중심구역 사람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꽤나 성공가도였다. 잠뜰이 가게를 연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던 때 역병이 돌아 중심구역의 사람들이 우르르 죽어나가지만 않았다면. 잠뜰의 주변 가게들은 단골손님이 사라지거나, 심각한 경우 가게를 운영할 본인이 사라지는 바람에 우후죽순 문을 닫았다. 이제 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시장구역 끝자락에서, 잠뜰은 여전히 시계점을 지키고 있었다.


손님들이 앉는 의자에 먼지가 쌓였다. 잠뜰은 책상 위에 엎어져있다가 본인도 먼지처럼 눌어붙는 게 아닌가 하고 한숨을 쉬었다. 지독하게 고요했다. 차라리 가게 문을 닫아버릴걸 싶었지만, 제대로 벌리는 수입도 끊긴 마당에 최소한의 출근수당도 받지 못하면 큰 타격이 올 게 뻔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출근수당이나 받으면서 버틴다. 잠뜰은 이를 악 물었다. 문에 달린 방문벨이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소리인지. 잠뜰은 본인이 문에 벨을 달아두었다는 것도 까먹은 참이었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잠뜰의 앞에 서서야 눈치챘다.

"아! 안녕하세요, 손님! 죄송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손님이 오셔서……!"
"시계 하나만 맡깁시다."

손님은 로브에서 회중시계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 빛 바랜 회색에, 나름 도금도 해두었던 것인지 자잘한 금색 껍질이 눈에 띄었다. 시곗바늘은 째깍, 째깍 잘 움직였고, 겉표면이 시대를 지나 보기 흉한 것만 빼면 멀쩡한 시계였다. 손님은 본인이 던진 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손님, 그래서 이 시계에는 어떤 문제가…."
"한번 열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잠뜰은 손님과 시선을 맞췄다. 로브를 꾹 눌러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눈매가 그리 순하지는 않았다. 악의, 혹은 지독한 애증이 있지 않고서야 그런 눈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손님을 처음 보는데. 잠뜰은 손님에게 혹시 어디서 나를 만난 적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손님은 금방 가게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열어본 시계는 부품이 없었다. 태엽이 들어갈 구멍도, 톱니바퀴도. 그 안에는 오로지 오색 빛을 내는 돌조각 하나만 들어있었다. 잠뜰은 그 돌조각을 겨우 빼내어 들여다보았다. 그냥 돌인데. 그냥. 빛나는 돌. 이런 빛은 처음인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홀리듯 빠져들었다. 창문 틈으로 비치는 노을의 주황색이 돌에 닿자 가게 전체를 불태워버릴 것처럼 반짝거렸다. 시계에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돌을 빼낸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에너지가 이 돌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잠뜰은 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님이 언제 온다고 말은 안 했지, 조금만 더… 살펴봐도 되겠지? 책상 서랍을 열자 갖가지 공구들이 빛났다. 작은 망치, 드라이버, 스패너…… 그 틈새에 남은 할아버지의 금색 태엽. 저도 모르게 태엽을 집어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저런 거 본 적 있어요? 태엽에 대고 중얼거리자 텅 빈 가게 벽
이 말을 따라했다. 돌도 조금 웅웅 거렸다.

가게 문이 거세게 열린 건 조금 뒤였다. 잠뜰이 그 돌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중 헌병이 들이닥쳤다. 잠뜰은 놀라 돌과 태엽을 앞치마 주머니에 숨겼다.

"꼼짝 마! 마법 연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주머니 안에서 태엽이 돌과 함께 웅웅거리며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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