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rom Underground

(15)
From. Underground (15) 15. 난 자리 각별은 태생부터 그 곳에 있었다. 밑바닥 중에서도 가장 위. 물밑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내려다보는 자리. 그런 모순적인 자리에, 각별은 처음부터 발을 딛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검게 물든 하늘을 보며, 제 발밑을 기어다니는 수십, 그 밑에 깔린 수백의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리며, 발밑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 어깨를 붙잡은 손에 기대어 섰다. 손의 주인은 그림자에 묻힌 얼굴로 늘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각별아, 너는 왕이 될 거야." 이 세상은 당연하게도 군주제가 아니다. 절대왕정이라는 구시대적 정치관은 이미 혁명의 붉은 물결에 쓸려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잔재가 하수구 밑에 잠겨 일렁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우물 안에서 그 위가 하늘이라 믿으며 자란 개구리는 그런 것을 모른다. 그저 그 ..
From. Underground (14) 14. 별 거 아닌 "생각보다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옛날 친구를 만나서." 도르르륵, 각별이 의자를 돌렸다. 공룡의 얼굴 곳곳에 난 멍과, 누가 봐도 주먹질 한 번 거하게 하고 온 손등의 핏줄. 각별이 우스개소리를 건넸다. 너 레쏘 패고 온 건 아니지. 내가 그렇게 앞뒤 없는 놈으로 보여? 공룡이 화답하며 실없이 웃었다. 치아에 긁힌 입 안쪽이 움직일 때마다 따갑고 아팠다. 각별이 책상 위의 펜을 손끝으로 살짝 세워 돌렸다. "수현이가 뭐래?" "잠뜰이 일을 꾸미고 있어. 대체 뭘 원하고 그러는 지는 모르겠지만." "우재는." "우재는 한동안 조용할 거야. 그 쪽도 머리가 있으면 더 나대지는 못하겠지." 그건 조금 다행이네. 공룡은 책상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올려져있던 종이 몇 장이..
From. Underground (13) 13. 붉은 손(1)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얼룩들이 곳곳에 묻었다. 문질러 지우려고 해도 쉽게 떨어지질 않는 얼룩들에 속에서부터 욕지기가 올라왔다. 귀를 찌르는 총성도, 비명도, 빛이 꺼져가던 눈빛도 아직 생생했다. 3개월. 라더는 아직도 그 3개월 전의 망령에게 발이 묶여있었다. 영문 모를 말을 쏟아내다가 그 질척하고 구역내나는 삶을 멈추고 만 망령에게. 잠뜰은 라더에게 자신의 총을 들려보내며 몇번이고 어깨를 토닥였다. 나도 처음 임무 나갔을 때는 무서웠거든. 그런데 하다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괜찮아질 거라는 의미였지만 라더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너도, 이 밑바닥의 인간이 될 거야. 이 밑바닥에 있는 게 어울리는 인간 말이야. 라더는 인간으로 살고 싶었지만, 그만큼 어..
From. Underground (12) 12. 한 자락 돌아온 덕개를 먼저 맞아준 건 또니였다. 수고했어. 보다는 아직 보스 안 왔는데. 라는 말이 먼저 귀에 들렸다. 또니는 들고 있던 펜을 창틀에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너 데려다주고 오자마자 급하게 나갔어. 이야기할 게 있다고 피에니타 사옥으로 간다던데." 다음 작전 회의 때문 아닐까. 뒤에 작게 덧붙였다. 덕개는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또니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빨간 숫자판이 카운트다운을 하듯 빠르게 줄어들었다. 숫자가 1에 가까워질수록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띵. 청명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끼긱거리며 열렸다. 그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순간 또니가 어깨를 잡아챘다. 잠시 긴장이 풀린 순간을 놓치지 않은 날랜 손길에 몸이 속수무책으로 뒤로 쏟아졌다. ..
From. Underground (11) 11. 물보라(4) "이름이 뭐라고?" "라더…요." 멍 투성이 팔뚝을 하얀 붕대가 감쌌다. 닿은 곳이 금세 붉게 더럽혀졌다. 차라리 붕대를 빨간 색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더러워지지 않게. 잠뜰이 붕대 끝을 꽉 당기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상처가 꽉 눌리자 입에서 우그러진 숨이 샜다. 자, 됐다. 잠뜰이 히죽 웃으며 붕대 위를 짝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차마 제어하지 못한 비명에 가까운 단말마가 튀어나갔다. "그래도 너 대단하더라. 신고식에서 그렇게 오래 버티는 애는 처음 봤어." 잠뜰은 상기된 얼굴로 라더가 그 검은 양복들 사이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서 있었는지, 작은 어린애 하나 이기지 못해 쩔쩔매는 꼴들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싸우는 ..
From. Underground (10) 10. 물보라(3) 공룡이 강하게 바 테이블을 내리쳤다. 레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워낙 거친 밑바닥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자연스레 담이 세진 게 분명했다. 이런 방식은 안 통하겠네. 공룡은 위협적으로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풀고 자리에 바르게 앉았다. "사장님, 유감은 없는 거 알죠?" 레쏘가 어깨를 으쓱였다. 손에 쥔 잔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닦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문질러 닦아댔다. 대화를 거부하는 건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한 작은 방어기제인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인지는 레쏘만이 알 일이었다. 공룡이 힐끗 바 내부를 살폈다. 육식토끼나 하율은 보이지 않았다. 찾아올 줄 알고 일부러 먼저 보냈나. 공룡은 몸을 노골적으로 기울여 레쏘에게 가까..
From. Underground (9) 9. 물보라(2) 우재가 천천히, 제가 내린 차를 중심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차를 탔는지 뻐근함에 못 이겨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수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다. 단순한 거래 현장에 어째서 수장인 우재가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잠뜰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각별은? "…레쏘." 지리멸렬하게 얽혀 책임소재를 찾던 신경이 단 한명에게 몰렸다. 레쏘. 거래에 대한 정보를 주고 아니마를 처리해달라 부탁한 사람. 레쏘. 그는 분명 알았을텐데. 단순히 거래를 탈취하여 선전포고를 날리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그는 분명 알았을텐데. "… 레쏘가 우릴 속였어." * "…그래, 여차하면 직접 개입해서 처리해." 각별이 먼저 무전을 끊었다. 뻐근하게 두통이 밀려왔다. 일이 꼬였다..
From. Underground (8) 8. 물보라(1) 닭의 목을 비틀어도 태양은 뜬다. 속절없이 아침이 왔다. 흐릿한 눈을 비비며 옆을 돌아보니 공룡이 누워있었다. 깨워줄까 물어보던 새벽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가슴팍을 팍 때렸다.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는 꼴이 퍽 볼만 했다. 부스스하게 엉킨 머리카락을 적당히 빗어내고 깔끔한 검은 정장을 챙겼다. 넥타이를 매는 손이 계속 미끄러졌다. 공룡에게 부탁하려다가 공룡도 넥타이를 잘 매지 못함을 기억해내고는 그만두었다. 대칭이 맞지 않는 넥타이를 몇번씩 건드리다가 아니마에 대해 들었던 정보를 상기했다. 대부분이 가족에게 버려져 길거리를 떠돌던, 갈 곳 없는 별종들인 조직. 그 별종들이 넥타이를 귀신같이 잘 맨다면 그것도 이상하게 보이겠지. 수현이 거울에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