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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15)

15. 난 자리

각별은 태생부터 그 곳에 있었다. 밑바닥 중에서도 가장 위. 물밑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내려다보는 자리. 그런 모순적인 자리에, 각별은 처음부터 발을 딛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검게 물든 하늘을 보며, 제 발밑을 기어다니는 수십, 그 밑에 깔린 수백의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리며, 발밑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 어깨를 붙잡은 손에 기대어 섰다. 손의 주인은 그림자에 묻힌 얼굴로 늘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각별아, 너는 왕이 될 거야."

이 세상은 당연하게도 군주제가 아니다. 절대왕정이라는 구시대적 정치관은 이미 혁명의 붉은 물결에 쓸려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잔재가 하수구 밑에 잠겨 일렁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우물 안에서 그 위가 하늘이라 믿으며 자란 개구리는 그런 것을 모른다. 그저 그 안에서 왕이 되기 위해 짓밟고 기어오르며 깨진 손톱 대신 손 밑 여린 살로 둔탁한 돌벽을 억세게 쥐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그에게 그나마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그는 손톱이 으스러질 필요도, 잡은 돌이 떨어져나갈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었다.

*

딱, 철제 책상 끄트머리에 손가락이 리듬감있게 부딪혔다. 작은 소리였지만 덕개에게는 천둥과 같았다. 저 소리가 천둥이라면 저 속 모를 노란 안광은 분명 번개리라. 덕개는 손을 꾹 말아쥐었다. 물어뜯어 갈라진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어리네."
"네?"

각별이 입에 물고 있던 볼펜을 까딱거렸다. 어리다고. 다시 말해드려요? 날 선 목소리가 정적을 부르고, 다시 물렸다. 이 방 안의 모든 것이 그랬다. 각별의 손짓, 작은 헛기침 하나에 움직였다. 덕개 역시 그랬다. 태생부터 거느리는 자였던 이의 위압감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뻐근한 뒷목에 땀이 한 줄기 흐르고, 역으로 선득한 기운이 올라왔다.

"여기는 네 자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거지. 내가. 우리 조직을 배신하고 당신들 편에 붙을게요. 하면, 고맙다고 두 팔 벌려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라고 생각했냐고. 말단 위치라도 집어넣어줬으면 그러려니 하고 다물고 구를 것이지, 어디서 간부들과 어깨 맞대겠다고 나대?"
"… 그러실 것 같아서, 이것저것 다 말해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원하신다면 첩자 노릇도 하겠-."
"이 바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신뢰야. 너는 그걸 이미 한번 깨고 왔어.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

덕개는 아랫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각별의 말이 맞다. 덕개는 배신자였다. 버려지기 전에 먼저 버리고 뛰쳐나왔다. 발레나를 저버리고 그 대척점에 선 피에니타에 몸을 숨겼다. 수현과 이신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각별의 발 앞까지 왔다. 밀쳐낸다고 물러나서는 안된다. 이미 앞도 뒤도 낭떠러지다.

"… 뭘 어떻게 해야 믿어주실건데요. 제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걸 어떻게 확인시켜드려야해요? 지금 누구보다 발레나 측을 무너뜨리고 싶은 건-"
"돌아가."

그리고, … 눈앞에서 선고가 떨어졌다. 올라간 입꼬리 안쪽에 허옇게 드러난 치열은, 그 사이에 끼인 자를 잔악하게 찢어발긴다는 점에서 단두대의 날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

아니마의 수장이 꼬리를 내리고 덕개가 잠적한지 어느덧, 달력이 넘어가고 계절이 바뀌었다. 12월 중순을 넘은 바람은 시리기만 했다. 라더는 사흘 간의 휴가가 끝난 뒤 더 미친듯이 일했고, 필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여느 때와 같이 조용히 자리만 지켰으며, 잠뜰은 차근차근, 아니마의 잠적으로 비어버린 것들을 먹어치웠다. 또니는 그 사이에 있었다. 모든게 변하지 않았으면서도 과하게 변했다. 덕개의 빈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채울 생각이 없는 것인지.

또니는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꽤 오래 고민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이 밑바닥에서는 꽤 흔하다. 거래에 나갔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는 사람도, 경찰에 잡혀 아무 언질 없이 감방에 들어간 사람도, 남아있는 알량한 도덕심을 붙잡고 도망쳤다가 그 도덕에 발목잡혀 쓰레기더미에 처박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덕개 역시 어디서 처참하게 죽어 발견되지만 않는다면, 아, 발견되는 것 마저 기적일테다. 그러므로 또니는 언제나처럼 제 자리에서 할 일을 하면 되었다. 높은 빌딩의 최상층 바로 밑에서, 밑바닥의 바닥에서 기어다니는 것들을 내려다보며 저 중에 절반은 올해가 가기 전에 사라지겠지.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그러면 되었다. 또니는 한 차례 건물을 휩쓸었던 폭풍을 곁에서 보았기에 두 발로 서 있는 높은 위치의 사람일수록 쉬이 휩쓸려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덕개도 마찬가지다.

"또니."
"네?"

허공 어드메를 보고 있던 흐릿한 시야에 흰 종이가 펄럭, 위협적으로 찔러들어왔다. 잠뜰이 눈앞에서 종이를 팔락거리다가 웃으며 거두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요. 그래. 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그렇게 바보같은 표정으로 있지 않았겠지. 팡, 박수소리가 간부회의 시작을 알렸다. 잠뜰은 언제나와 같이 가운데에 앉았고, 모든 간부들도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한 자리가 눈에 띄게 비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돌리는 건지 아닌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었다. 또니는 언제나와 같이 종이에 글을 적고, 늘어난 거래량과 아니마가 더는 손을 못 뻗게 된 여러 거래의 리스트를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처리할 것은 라더에게 일임했다. 저 붉은 눈이 같은 편이라는게 참 다행이었다.

"뭔가 다른 이상은 없는거지? 피에니타 측도 그날 이후로는 조용한 거 같고…."
"그쪽은 언제나 조용했으니까요. 아니마가 설치니까 좀 올라왔던거지."
"다른 조직들도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마가 조용해진 이후로 알아서들 사리는 모양이에요."

잠뜰이 옅게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방심하지 마. 우재가 자취를 감춘 것 뿐이지, 아니마가 괴멸한 건 아니니까. 물밑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을지 계속 주시해야지."

짝, 수고했어. 들어가 쉬어. 잠뜰의 말 한 마디에 의자들이 요란하게 우르르 빠지고 들어갔다. 먼저 보란 듯이 자리를 비우는 건 필립이었고, 그 뒤는 또니. 라더는 늘 마지막이었다. 또니는 닫히는 문 틈으로 라더와 잠뜰의 대화를 보곤 했다. 보스와 2인자 사이에서는 회의 때보다 더 많은 말들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쾅, 문이 닫혔다. 또니는 문 옆에 당당하게 매달린 흑백사진에 시선을 두며 걸었다. 중앙에 당당하게 앉아, 뺨에 튄 피를 제대로 닦지도 않고 웃고 있는 잠뜰과 그 옆에 앳된 기색이 가시지 않은 라더.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은 필립과, 피가 묻어난 소매를 뒤로 감춘 자신. 덕개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덕개를 데려온 건 저 사진을 찍고도 2년 뒤였으니. 또니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유달리 가까운 라더와 잠뜰의 틈을 보았다. 멍한 머리에서 한 가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라더도-

"왜 아직 안 가셨습니까?"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라더가 말을 걸었다. 라더의 주특기였다. 순식간에 뒤를 잡는 것.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뒷목이 선득했다. 또니는 그제야 사진에서 시선을 떼었다.

"아, 네? 그냥요. 옛날 생각이 좀 나가지고."
"벌써 5년 전이네요."
"그러게요…. 처음 잠뜰님이 같이 뒤집어엎어보자고 하셨을 땐 설마 되겠어 했는데. 그렇게 뒤집고도 5년이네요."

라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5년. 어느새, 하늘과 땅이 뒤바뀐지 5년.

늦지 않게 조심히 들어가십쇼. 하는 딱딱한 목소리가 들리고, 발걸음이 멀어지고 나서야 숨이 쉬어졌다. 긴장이 풀린 목덜미를 주물렀다. 어릴 때에는 저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 곳에 와서 받은 훈련이 저렇게 만든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저런 사람이었는지. 또니는 언제나 라더를 마주하면 느껴지는 불온한 공포가 불쾌했다. 그래서 더더욱 덕개에게 다가갔다. 덕개는 그래도, 이 세계 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작은 빛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부터 이 세계에 있던 자신은 가질 수 없던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 또니는 그제야 자신이 가진 애매한 기분의 정체를 알았다. 그리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이 결코 나가지 못할 세상에 대한, 본능과도 같은 그리움.

*

"아, 아 따-"
"가만히 좀 있어. 가만히, 좀!"
"너 이거 약 바르는 거 맞아? 이때다 싶어서 지금 사람을-"
"진짜 후벼파이고싶냐?"
"죄송합, 아니. 아!"

공룡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평소에는 총에 뚫리고 칼에 베여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달려들면서, 치료할 때만 이렇게 야단이었다. 수현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약을 마저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조금은 꽉. 공룡이 악 소리를 내며 원망스런 눈빛을 보냈다. 됐어. 나와. 어깨를 툭 밀자 맥없이 앞으로 우당탕 굴렀다. 수현은 아랑곳 않고 구급상자를 정리해 찬장에 집어넣었다.

"너 요즘 특히 더 구르는 거 같다."
"아니마 조용하잖아. 이럴 때 서열정리 한번 더 해주셔야한대."

아하, 수현의 귀가 쫑긋거렸다. 어쩐지 물밑작업이 많았다. 발레나든 어디든, 절대 움직이는 걸 들키지 말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던 각별이 생각났다. 그걸 위해 배로 늘어났던 서류와 통장들도. 공룡이 눈 밑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신도 티티도 거래처 오간다고 바쁘지, 결국 노는 건 나 뿐이다 이거야."

공룡의 푸념을 들으며 이불을 폈다. 사실 알고 있다. 공룡은 지금, 수현의 몫까지 구르고 있는 중이다. 일이 늘었는데, 사람은 한정적이다. 원래대로라면 두 명이 나갔어야 할 일도 공룡 혼자 나갔다. 원래대로라면 수현이 함께 나가기라도 해야하는데. 각별은 조용했다. 그 날, 덕개를 데려오고 한동안의 처신을 일임시킨 이후로는 특별히 수현을 부르는 일도 없었다. 수현은 덕개를 말단 조직원들 틈에 숨겨넣었고, 그 이후 조직은 언제나와 같이 흘러갔다. 수현은 전선에서 물러나고, 그 만큼 공룡이 총알을 맞았다.

"공룡아."
"왜."
"나, 간부 내려놓을까?"
"너 그러면 진짜 죽어."
"왜. 사무직들도 많잖아. 내가 내려가면 누군가는 올라가서 나 대신 더 일하겠지."
"야."

공룡이 몸을 일으켰다.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두 귀가 쫑긋거리다 축 처졌다.

"헛소리 하지 말고 자리 지켜."
"그게 덜 위험할 거야."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왜 그때도 지금도 날 아득바득 간부 자리에 두려고 하는건데?"
"나 졸려. 잔다."
"내가 간부 자리에 계속 있으면 너한테 약점이야. 몰라? 각별이 너 예뻐하는 게 언제까지 갈 것 같은데."
"잔다고 했어."

공룡이 이를 드러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수현은 공룡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간부 자리 보다 일반 사무직, 조직원 자리가 더 안전할텐데. 왜, 뭘 두려워하는 걸까. 그저 오랜 친구가 장기말로 사용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라면, 그따위 작은 이유라면,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나한테 올 중요 임무 다 네가 커버쳐주는 거 내가 모를 거 같냐."
"……."
"나 애초부터 간부직에 어울리는 사람 아니었어. 네가 제일 잘 알아. 난 사람 상대로 총도 못 쏘고, 주먹질도 못해. 입 털다가 상대가 총 겨누면 그대로 죽을 거야. 알잖아."
"사무직에 있으면 아닐 거 같아?"

뭐?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공룡이 천천히 다가왔다.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목소리가 따라 커졌다. 사무직에 있으면 언제 나갔다가 떼죽음 당해올지 모르는 거, 몰라? 네가 그렇게 잘하는 입 터는 건 시도도 못해. 수현의 귀에는 천둥과도 비슷하게 들렸다. 그리고 넌, … 말을 잇던 공룡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언가 말해서는 안될 것을, 입 밖으로 내야만 하는 사람처럼. 그리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결국 한 마디를 내뱉었다.

"…… 별종이잖아."

수현의 얼굴도 따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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