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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12)

12. 한 자락

돌아온 덕개를 먼저 맞아준 건 또니였다. 수고했어. 보다는 아직 보스 안 왔는데. 라는 말이 먼저 귀에 들렸다. 또니는 들고 있던 펜을 창틀에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너 데려다주고 오자마자 급하게 나갔어. 이야기할 게 있다고 피에니타 사옥으로 간다던데."

다음 작전 회의 때문 아닐까. 뒤에 작게 덧붙였다. 덕개는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또니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빨간 숫자판이 카운트다운을 하듯 빠르게 줄어들었다. 숫자가 1에 가까워질수록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띵. 청명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끼긱거리며 열렸다. 그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순간 또니가 어깨를 잡아챘다. 잠시 긴장이 풀린 순간을 놓치지 않은 날랜 손길에 몸이 속수무책으로 뒤로 쏟아졌다.

"너 무슨 일 있지."
"없어요."
"있구만."
"없다니까!"

이 녀석 봐라. 정장 자켓이 꾸욱 구겨지며 살갗까지 주름을 남겼다. 또니가 자주 사용하는 위협방식이었다. 입단한 지 얼마 안되었던 때에는 그 손길 하나하나에 긴장하며 눈치를 보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던 각인된 것들이 다급함에 짓눌려 저 끝으로 밀려났다. 덕개의 목 안쪽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순간 또니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아귀 힘이 풀렸다. 덕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칠게 손목을 잡아채고는 떼어냈다. 별종의 힘은 일반인을 웃돈다. 애초에 전면전이 특기가 아닌 또니가 그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번도 없던 일이다. 만약의 상황으로 염두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이다. 덕개가 반감을 가지고 반항한다는 것. 또니가 손목을 역으로 감싸 얽맸다. 힘을 쓰느라 관자에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야, 덕개야. 누님한테 뭐하는 짓이냐."
"나 급해요. 별 거 아니니까 그냥 내버려둬요. 나중에 내가 다…."
"너 거기서 뭐 이상한 거 들었지."
"아, 또니님, 제발."
"너 피에니타 녀석들 말 듣고 이러는 거야?"
"누나."
"그래, 덕개야. 너 누나 못 속여. 나 속이려 하지 마."
"누나, 제발."

덕개의 무릎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작지 않은 덩치가 순식간에 반 이상으로 접혀들었다. 누나, 누님. 농담으로도 하지 않던 친근한 호칭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능청스럽게 받아줬을 또니는 덕개의 손을 붙잡고 붙들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대체 뭐가 문제냐. 라디오 잡음 같은 소음들 속에서 혼자만 또렷하게 목소리를 냈다. 덕개의 말은 애원과 비슷했다. 제발 내가 서 있을 곳이,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곳이 맞다는 확신을 달라. 우스운 말이지만 신뢰가 필요했다.

"…나 보스 사무실에서, 딱 하나만 확인해보고 올게요."
"덕개야."
"확인만 하면. 그러고 나면 다 말할게."

손아귀에서 힘이 서서히 풀렸다. 엘레베이터 문은 닫힌 지 오래였다. 나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그래요. 덕개가 손을 놓았다. 두 손목이 달랑 얽혀 걸리고는 떨어졌다. 또니는 가만 있었다. 이제 선택은 또니의 몫이었다. 끝까지 붙잡거나, 그냥 눈 감고 보내주거나. 또니가 입을 열었다. 덕개야-.

꾹. 엘레베이터 문이 도로 열렸다. 덕개가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열린 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또니가 뒤늦게 붙잡으려 했지만 문이 닫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철제 문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잔상처럼 남았다. 덕개가 급하게 버튼을 눌렀다. 잠뜰의 사무실.

*

"…너 뭐하는 짓이야."

떠나버린 엘레베이터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붉은 불이 꺼진 버튼 앞에 필립이 있었다. 필립은 팔짱을 낀 채 옆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상황파악이 된 또니가 순식간에 멱을 잡아채 벽에 메다꽂았다. 아. 입에서 작게 숨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뭐하는 짓이냐고 묻잖아."
"덕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한번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저 녀석은…."
"믿은 적 없잖아요."

필립이 또니의 팔을 잡아 떼어냈다. 애초에, 신뢰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보랏빛 눈동자가 고스란히 접혔다. 또니는 그 눈을 알았다. 5년 전 그 날, 잠뜰의 총구가 필립을 향한 순간 보였던 그 눈. 모든 선택권을 상대에게 일임하는 동시에 상대로 하여금 아무 선택도 할 수 없게 하는 그 눈. 다만 이번에는 그때처럼 입을 다물지 않았다. 필립은 계속 입을 열었다.

"신뢰라는 건, 일단 있어야만 깨질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됐어. 또니가 필립을 거칠게 뿌리치고 엘레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렀다. 잠뜰의 사무실에 도착해 멈춰있던 붉은 숫자판이 천천히 다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필립은 말리지 않았다. 구겨진 셔츠를 정리하며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낮인데도 그늘 속은 어두웠다. 겨울이 다가와 해가 짧아진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순전히 이 상황을 불편하게 느끼는 탓이거나. 송곳니로 입술 가장자리를 물어뜯었다. 비릿한 것이 탁 터졌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저 편에서 간간히 정적을 깼다. 그 소리를 따라 공룡이 입을 열었다.

"이제와 화해라도 하자는 거야?"

의도는 없었으나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라더가 고개를 저었다. 손 잡고 미안하다 주고받는 걸로 끝나기에는 너무 오래 지나버렸잖아. 11년이 지났다. 라더도 공룡도 이제 소년 티는 벗어던진지 오래였다. 바닥에서 구르고 담뱃재를 들이마셨던 때라고 해도 지니고 있던 아주 작은 순수는 이미 붉게 흩어져버렸다. 그럼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정적을 견디지 못한 공룡이 재촉했다. 라더의 입에서 숨이 흘러나왔다. 말을 시작하려는 숨이. 천천히, 뒤이어 성대가 붙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현이는 왜 거기 같이 있는 거야."

뭐? 예상 외의 말에 잠시 호흡이 멈췄다. 수현이 왜 같이 있느냐고. 왜 피에니타에 같이 있느냐고 물었다. 공룡에게 그 말은 다른 해석의 여지 없이, 왜 수현마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들었느냐는 뜻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왜 옳은 길로 가지 못했느냐는 질책. 라더가 정적을 깼다. 조금의 원망이 섞인 눈동자가 공룡을 찔렀다.

"잘 살아보겠다고 했잖아."

더러운 일 하지 않고 살겠다고 말했잖아. 회의 날 복도에서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 또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를 갈았다. 끝나지 않았어. 끝났어.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하리라는 걸 라더도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왜 다시. 공룡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상한 두통이었다. 라더가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네가 손에 피를 묻힌 걸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럼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수현이는 막을 수 있었잖아."
"지금 수현이까지 이 밑바닥에서 구르게 된 게 내 책임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 때 수현의 곁에 있던 건 너 뿐이었잖아. 수현이는-. 순식간에 팍, 소리와 함께 라더의 등이 벽에 처박혔다. 셔츠가 구겨졌다. 멱을 잡아채 올리자 반사적으로 컥, 하고 숨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게 어떻게 내 책임이야. 그게 왜 내 책임이야."
"네가, 수현이를, 놓지 못했잖아."
"그럼 그냥 거기서 죽게 놔뒀어야했을까? 저기 계신 도련님 총알에 머리가 날아가게 그냥 내버려뒀어야 했냐고."
"핑계 대지 마. 멀쩡하게 살 수 있던 애 시궁창으로 같이 끌고 간 거 너야. 처음부터 너였어. 의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세상이니 뭐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너는!"

목에서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뾰족한 이가 저들끼리 맞물려 갈리는 소리를 냈다.

"함께 다시 잘 살아보자고 한 거, 거절한 건 너였지. 손에 피 좀 묻힌 게 얼마나 큰 오점이라고. 이 밑바닥에서 위로 간 놈들 손에 핏자국 한 바닥어치 없는 녀석이 어디 있다고!"

*

"… 그쪽 말이 맞았잖아."

마구잡이로 펼쳐진 종이뭉치 한 가운데에 주저앉았다. 적당히 구겨진, 손글씨로 듬성듬성 메모가 적힌 종이가 힘 빠진 손에서 빠져나갔다. 잠금장치가 박살난 맨 아래 책상, 그 더 깊은 곳에 숨겨진 파일 안쪽. 빼곡히 적힌 아니마에 대한 정보들과, 손글씨로 더 빼곡해진 사본. 숨길 것과 아닐 것을 명확히 해둔 서류들. 구해서는 안되는 정보들이 가득한 서류들.

발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고 묘하게 떠 있는 듯한 소리로 보아 또니였다. 덕개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중요해보이는 서류 몇 가지를 눈에 담았다. 원래 있던 자리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으면서, 몇 장은 접어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서랍의 잠금장치를 복구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닫아두었다. 발소리가 거의 직전에 다 와서야 정리가 끝났다. 불안한 만큼 문을 강하게 열었다. 무엇이든 숨겨지지 않을까 싶었다. 바로 앞에 또니가 서 있었다. 또니는 문을 박차고 나온 덕개를 확인하자마자 손목을 쥐어잡고 노려보았다.

"너 안에서 뭐 했어."
"아무것도 없었어요."
"똑바로 말 안 해?"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거예요. … 걱정 하지 마세요."
"…."

또니가 덕개를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턱 닫히자 덕개는 걸었다. 문 옆에 당당하게 걸린 흑백사진을 바라보았다. 비뚜름한 표정의, 그렇게 오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려보이는 라더와 사진 중앙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앉은,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낼 생각도 않고 승리의 기쁨을 치하하는 잠뜰을 보았다. 잘들 놀았다 이거지. 덕개는 그리 중얼거리고는, 액자의 중앙에 손을 올렸다. 유리가 손바닥 살에 마찰되어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끼긱, 손자국은 잠뜰의 얼굴 가운데를 지나, 라더의 목을 거치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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