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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10)

10. 물보라(3)

공룡이 강하게 바 테이블을 내리쳤다. 레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워낙 거친 밑바닥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자연스레 담이 세진 게 분명했다. 이런 방식은 안 통하겠네. 공룡은 위협적으로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풀고 자리에 바르게 앉았다.

"사장님, 유감은 없는 거 알죠?"

레쏘가 어깨를 으쓱였다. 손에 쥔 잔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닦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문질러 닦아댔다. 대화를 거부하는 건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한 작은 방어기제인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인지는 레쏘만이 알 일이었다. 공룡이 힐끗 바 내부를 살폈다. 육식토끼나 하율은 보이지 않았다. 찾아올 줄 알고 일부러 먼저 보냈나. 공룡은 몸을 노골적으로 기울여 레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 보스가 확답 받아오래요. 뭐에 대한 건지는…."
"아니마에 대한 건가요?"

레쏘가 먼저 화제를 꺼냈다. 발뺌하지 않는다. 안경알 너머 갈색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듯 곱게 접힌 눈꺼풀 틈에서 초연함을 유지했다. 손끝이 테이블을 딱딱 두드렸다. 도리어 불안감이 생기는 건 이쪽이었다. 공룡도 직설적인 방법을 택했다. 예.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나봐요?"

*

수현이 시간을 확인했다. 거래 예정 시각까지 1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시간. 이 대치상태를 이어간다면, 훼방을 놓는다는 목적은 달성하고도 남았다. 다만 우재의 존재가 걸렸다. 자료에 따르면 우재는 이런 일을 당하고도 얌전히 있을 사람이 못되었다. 이대로 두고 발을 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처리할 수도 없다. 우재가 사라지면 큰 해일이 들이닥칠 것임을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은 모두에게 독이다. 아무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도? 수현의 귀가 바짝 섰다. 정말 아무도 원하지 않는가? 레쏘는 왜 잘못된 정보를 잠뜰에게 주었는가. 전달책의 역할 이상은 맡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나섰던 레쏘가, 왜 그랬을까.

수현은 말을 잘 했다. 그만큼 머리도 좋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얽힌 생각들을 풀어내고 정리해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이신과 우재의 총소리가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와중에도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총알이 주위를 둘러싼 온갖 컨테이너에 박혀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 중 몇 개는 수현과 덕개가 숨어있는 컨테이너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덕개가 옆에서 수현을 재촉했다. 3:1이에요. 처리하지 않더라도 제압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저 사람 혼자서는…. 수현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첫째, 애초에 아니마 측에서 레쏘에게 잘못된 정보를 넘겼을 경우. 둘째, 레쏘가 잠뜰에게 고의적으로 그릇된 정보를 흘렸을 경우. 셋째, 잠뜰과 레쏘가, 고의적으로 피에니타 측에 잘못된 정보를 건넸을 경우….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은 세 번째였다. 잠뜰이, 왜? 잠뜰은 제 아래 사람을 끔찍하게 챙겼다. 간부진들도 격식 없는 자연스러운, 그러나 굳건한 충성이 기반이 되었다. 그런 충성이 없었다면 아마 내분으로 얻은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만약 모든 게 잠뜰과 레쏘가 함께 꾸민 짓이라면, 이 자리에 덕개는 없었어야했다. 수현이 아는 한 잠뜰은 절대 제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사람이 못되었다. 대를 위해 소를 버려야한다면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이었다. 수현이 알고 모두가 아는 잠뜰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재미있게도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잠뜰에게 덕개는 애초에 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덕개의 읽기 힘든 얼굴에서 당황과 경악의 빛이 서서히 걷혔다. 혼란이 확신으로 변했다. 총알 몇 발이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빗겨갔다. 덕개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총 들어요. 수현이 답이 없자 한번 더 물었다. 여전히 답이 없자 질문이 명령으로 바뀌었다.

"그냥 있을 거면 거기 가만히 계세요."

이신이 신호라도 보내듯 덕개와 수현이 숨어있던 컨테이너 건너편을 세게 발로 내리찍었다. 속이 텅 빈 철판 상자가 요란하게 진동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덕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나갔다. 수현은 덕개의 소매를 붙잡으려다가 알 수 없는 기억에 막혀 그만두었다. 날카로운 총성과 작은 비명이 들렸다. 욕짓거리를 내뱉는 목소리가 메아리 하나 없이 항구를 꽉 채웠다. 덕개가 총을 다시 겨누었다. 이번에는 수현이 달려나가 달아오른 총구를 붙잡았다. 컨테이너들 사이, 제가 타고 온 차 뒤편에서 팔을 붙잡고 신음하는 우재가 보였다. 이신이 컨테이너 위쪽에서 우재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금방이라도 쏠 것처럼. 흔들리지 않게. 수현은 급하게 생각을 돌렸다.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방아쇠가, 당겨진다. 그래도, 괜찮은가?

"멈춰!"

수현이 목이 찢어져라 다급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신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총구를 내렸다. 이런 면에서 이신은 다루기 쉬웠다. 적절한 명령이 떨어지면 반문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는 수현의 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성적으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우재를 죽이는 것도 죽이지 않는 것도 문제라면, 일단 살려두고 물을 것을 묻자. 이신은 훌쩍 컨테이너 위에서 뛰어내려 우재에게 다가갔다. 수현도 덕개의 등에 손을 올려 떠밀며 천천히 다가갔다. 총구를 붙잡은 손바닥이 열감에 파르르 떨렸다.

"당신이, 아니마의 수장 우재로군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별 볼일 없는 쥐새끼인 줄 알았는데, … 피에니타에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
"저희도 당신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

수현이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우재의 오른손에는 아직 총이 들려있었지만, 뒤에 이신이 있는 걸 빤히 알면서도 무모하게 총질을 할 정도로 대책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이미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모르지만. 수현은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우선, 레쏘에 관한 것부터.

"묻는 말에 제대로 답만 해주세요. 우리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

"공룡은?"
"아까 급하게 나가던데요. 지시를 받은 모양입니다."

라더가 잠뜰의 어깨에 자연스럽데 자켓을 걸쳤다. 고맙다. 말로 하지 않고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나한테는 나올 게 없어보이니까, 레쏘를 털어보려는 거겠지."
"정말입니까?"
"뭐가?"

정말 피에니타를 속이신 게 맞나요. 라더가 잠뜰의 앞으로 발을 뻗어 몸을 틀었다.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다고 하시던 분이. 잠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런 걸 물어?"

앞에 주어가 빠졌다. 네가. 왜? 함께 해 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라더는 잠뜰의 속내를 단번에 알았다. 라더는 한번도 잠뜰을 의심한 적 없었다. 11년 전 잠뜰의 손을 잡아 발레나에 오게 되었을 때도 라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도,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잠뜰의 등 뒤에 서서 제게 쏟아지는 날 선 눈동자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딱히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도시의 사람이라면, 특히 밑바닥에 붙은 사람이라면. 잠뜰은 라더를 밑에 두고 가르쳤다. 생겼으나 질문하지 않았던 의문들은 세월이 알아서 묻었다. 모르는 건 모르는 채, 아는 것은 모르는 체. 라더는 그렇게 살아왔다. 잠뜰이 다시 반문했다. 왜 그런 걸 물어? 라더는 입을 다물었다. 다물어야했고 그러려고 했다.

"…보스가 원하시는 게 따로 있어보여서요."
"라더야."

잠뜰이 라더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라더야. 작은 소리였지만 생각을 찢어가르기 충분했다. 잠뜰이 고개를 숙였다. 말을 정리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준다면 좋을텐데. 라더는 심장 구석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꼈다.

알게 된 것들 중에 가장 모르겠는 것을 묻는다면, 단언컨대 잠뜰의 속내였다. 나는 정상에 오를 거야. 밑바닥의 정상 말이야. 잠뜰은 라더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 늙은 사자의 목을 잘랐다. 그 사자의 밑에 있던 작은 것들도 전부 치워버렸다. 단 하나, 일찌감치 꼬리를 내린 겁쟁이 여우만 빼고. 그렇게 피를 밟고 원하던 자리에 올랐음에도 잠뜰은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라더는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먼 곳.

잠뜰이 고개를 들었다. 입이 열렸다. 라더야. 너는 지금 세상이 괜찮다고 생각하니?

세상은 썩었다. 구제의 여지 없이 썩어 문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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