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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11)

11. 물보라(4)

"이름이 뭐라고?"
"라더…요."

멍 투성이 팔뚝을 하얀 붕대가 감쌌다. 닿은 곳이 금세 붉게 더럽혀졌다. 차라리 붕대를 빨간 색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더러워지지 않게. 잠뜰이 붕대 끝을 꽉 당기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상처가 꽉 눌리자 입에서 우그러진 숨이 샜다. 자, 됐다. 잠뜰이 히죽 웃으며 붕대 위를 짝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차마 제어하지 못한 비명에 가까운 단말마가 튀어나갔다.

"그래도 너 대단하더라. 신고식에서 그렇게 오래 버티는 애는 처음 봤어."

잠뜰은 상기된 얼굴로 라더가 그 검은 양복들 사이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서 있었는지, 작은 어린애 하나 이기지 못해 쩔쩔매는 꼴들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싸우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 라더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질문과 대답을 늘어놓았다. 라더는 그 물음의 홍수 속에서 제가 가진 근본적인 의문을 놓치지 않도록 계속 곱씹었다.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왔을까.

라더는 사람을 죽였다. 정당방위가 될 여지가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라더에게 법은 언제나 자비 대신 철퇴를 내렸다. 변호의 기회는 가진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였다. 라더는 제 손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순간 제 목숨도 내놓아야함을 직감했다. 그는 인간이었기에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뜰의 손을 잡았다. 더 이어붙여봐야 뚜렷한 목표도 의미도 보이지 않을 삶을 이어가길 택했다. 두 사람과 같이 다니는 동안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합리화하며 이유를 찾는, 밑바닥에 딱 어울리는 삶의 방식.

잠뜰이 붕대를 정리해 안쪽에다 들여놓았다. 라더는 생각의 홍수 속에 잠시 몸을 뉘였다. 잠뜰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한 몇 년은 입이 틀어막혀있던 사람처럼 쉴새없이 떠들었다. 라더에게 말이 닿느냐 아니냐는 뒷전이었다. 그저 이렇게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저도 공룡과 수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랬으니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자마자 봇물 터지듯 모든 게 쏟아져나왔다. 잠뜰도 그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래도 내일부터는 조금 널널할 거야. 우리 같은 말단에게는 별 일 안 시키거든."

너 내 밑으로 올 거야. 내가 말하는 대로만 따라와. 잠뜰이 생글 웃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밝고 해사한 웃음이었다.

*

우재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탁한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맑아 보일 정도로 웃었다. 덕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현도 말을 잃었다. 이신이 우재의 뒤통수에 총구를 짓눌렀다. 우재는 아랑곳 않고 웃었다. 웃음 사이사이에 말이 끊겨 튀어나왔다. 그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덕개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닥쳐. 조용히 해. 생각하는 데 방해되잖아. 덤벼들려는 걸 수현이 막았다. 우재가 마지막 웃음과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팍 들었다.

"너희, 다 속았어. 그 두 약아빠진 것들에게 속은 거라고."

이신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마에 핏줄이 후두둑 돋아났다. 하지 마. 수현이 제지했다.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는 건 수현 뿐이었다. 일말의 이성을 끄집어냈다. 우재의 말이 거짓이라면.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으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재가 레쏘에게 전달을 부탁한 정보는 현재 상황과 같다. 단순 말단 거래가 아니라, 아니마의 사업의 기반이 되는 약품의 밀수입이었다. 당연히 우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중요한 거래. 레쏘는 알고 있었다. 그럼, 레쏘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흘렸을까? 레쏘가 굳이 아니마 편을 들 이유가 없다. 레쏘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다무는 사람이었다. 덕개가 머리칼을 세차게 헤집었다. 그럼, 왜 잠뜰에게 정보를 줬을까? 잠뜰은 왜 피에니타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며 공조를 요청했을까. 자신의 측근들까지 속이면서. 덕개에게 힐긋 시선을 주었다. 미간에 잔뜩 주름이 졌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덕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저 눈동자 안에 가득 들어찬 감정은 어떤 종류일까. 배신감, 혹은 간파당하고 말핬다는 당혹과 분노. 수현은 전자에 걸었다.

"알고 있었어요?"
"뭘요."
"그쪽 보스가, 잠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

덕개는 알았다. 정확하게는 이제야, 알았다. 잠뜰이 그렇게 말했다. 질서래봤자 층 나뉜 구정물일 뿐이야. 절대 맑아질 수 없는 구정물. 바 시뮬이 조직들의 주 거래처가 되어버린 것을 원치 않던 레쏘와, 이 밑바닥을 원치 않던 잠뜰이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켜 모든 것을 어그러뜨리려 했다면. 그렇다면 말이 된다. 레쏘가 왜 정보를 흘렸는지, 잠뜰은 왜 자신에게도 비밀로 했는지.

"몰랐나본데."

이신의 목소리가 혼란한 머릿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재는 더 이상 말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어떻게 쌓아온 것들인데, 같은 별종 놈들에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덕개는 제 오른손에 총이 들려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겨 저 입이 막히고, 이 모든 게 하나로 정리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우재만 조용해지고, 이신과 수현이 입을 다물기로 하면 별 것 아닌 일로 끝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단순히 혼선이 왔던 걸로 끝낼 수 있다. 덕개는 전쟁을 원치 않았다. 정확하게는, 이 삶이 혼란과 함께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제가 서 있는 붉은 웅덩이에 천천히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제가 가서 확인해볼게요."

덕개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믿음을 버렸다. 먼저 불신을 심어준 건 잠뜰이다. 그러니, 이건 그냥 확인이다. 여기는 아무 일도 없던 거예요. 우리는 일을 잘 처리한 거고, … 제가 잠뜰님께 확인을 해볼테니까, … 연락 드릴게요. 뜨문뜨문 말을 뱉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신에게 우재를 놓아달라 요청했다. 이신은 잠시 둘을 노려보다가 손을 놓았다.

"나를 죽이는 편이 깔끔할텐데."
"이상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죽일 거예요. 이제 그럴 이유가 충분하니까."

우재가 웃었다. 이신이 우재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가져온 차 타고 조용히 사라져. 뒷머리에 다시 까끌한 총구가 닿았다. 우재는 웃었다.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목적 자체는 이룬 셈이다. 거래는 성사되지 못했고, 아니마 조직원 한 명은 죽었다. 수많은 의문만 해결된다면 모든 건 원래대로 돌아간다. 잠뜰과 각별은 다음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할테고, 아니마는 천천히 궤멸의 발판을 밟는다. 물론 이것이 잠뜰과 레쏘가 바라던 바는 아니리라. 우재가 차를 타고 떠나자 힘이 쭉 빠졌다. 머리가 복잡했다.

*

바에서 나왔는데도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레쏘는 끝까지 영양가 있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한 가지만 확실해졌다. 레쏘는 아니마의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발레나의 편도 아니다. 피에니타의 편은 더더욱 아니다. 뇌를 흩트릴 수 없으니 애꿎은 머리카락만 헤집어놓았다. 띠리릭, 품에 넣어둔 무전기가 울렸다. 공룡은 발신인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버튼을 눌렀다. 기껏해야 수현, 아니면 각별. 티티와 이신은 절대 공룡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부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공룡과 수현은 눈엣가시였다. 각별의 변덕으로 들여진 불확실한 무언가들.

"예."
"레쏘가 뭐라던."
"그냥 입 다물던데. 아는 구석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아."

무전기 너머에서 각별 특유의 고민하는 소리가 났다. 그 정적 사이로 어렴풋이 티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별님, 수현님과 이신님이 돌아오고 있답니다. 각별이 무어라 신호를 주었는지 짧은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드르륵, 의자 바퀴가 대리석 바닥 위에서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별의 사무실 구조를 생각하면, 창가 쪽이다.

"레쏘가 잠뜰이랑 손을 잡았을까?"
"아니, 말하는 걸 보면… 아니마의 편도 발레나의 편도 아니야. 어쩌면 독단적으로…."
"발레나가 아니라, 잠뜰의 편일 것 같으냐고 묻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돌아가는 꼴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각별이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저 너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이 왔어. 얘기 좀 해보고 다시 연락하지. 일방적으로 뚝 끊긴 무전기는 노이즈 하나 없이 멍한 정적만 뱉어냈다. 공룡은 대충 자켓 안주머니에 무전기를 쑤셔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다. 어울리지 않게도 푸르다. 매연과 안개가 뒤섞인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푸르다. 괜히 맛도 들이지 않은 연초가 당겼지만, 저 뿌옇고 푸른 하늘에 쓸데없는 것들 더하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 대신 하, 입김을 뱉었다. 11월의 공기는 입김이 형체를 갖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비추고 허공으로 흩어져버리는 허연 수증기 사이, 어렴풋하게 드리워진 인영을 향해 시선이 꽂혔다.

"…아."

붉은 머리카락과 더 붉은 눈동자. 익숙한 인영, 라더. 라더가 입을 꾹 다문 채 공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당혹감이 시야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안 거지? 공룡이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투로 먼저 말을 건넸다. 이렇게 마주친 거 모른 척 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이야기는 끝났어? 우리 보스랑 너네 보스 말이야."

라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네 보스한테 한 소리 듣기라도 했어? 한 잔 하러 온 거야?"
"공룡아."

열린 입술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송곳니보다 더 날카로운 말이 귀에 꽂혔다. 적의도 무엇도 담겨있지 않았는데 괜히 그랬다.

"우리 할 말이 좀 있잖아."

공룡은 알았다. 이제 이 폭탄의 불을 끄든, 터트리든, 하나는 해야만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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