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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13)

13. 붉은 손(1)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얼룩들이 곳곳에 묻었다. 문질러 지우려고 해도 쉽게 떨어지질 않는 얼룩들에 속에서부터 욕지기가 올라왔다. 귀를 찌르는 총성도, 비명도, 빛이 꺼져가던 눈빛도 아직 생생했다. 3개월. 라더는 아직도 그 3개월 전의 망령에게 발이 묶여있었다. 영문 모를 말을 쏟아내다가 그 질척하고 구역내나는 삶을 멈추고 만 망령에게.

잠뜰은 라더에게 자신의 총을 들려보내며 몇번이고 어깨를 토닥였다. 나도 처음 임무 나갔을 때는 무서웠거든. 그런데 하다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괜찮아질 거라는 의미였지만 라더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너도, 이 밑바닥의 인간이 될 거야. 이 밑바닥에 있는 게 어울리는 인간 말이야.

라더는 인간으로 살고 싶었지만, 그만큼 어중간한 인간으로 죽고 싶지도 않았기에 총을 들었다. 타겟은 새로 정계에 얼굴을 들이민 인사. 평범한 젊은 정치인이었지만 발레나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처자식을 두고 세상을 등져야하만 하는, 안타까운 사람. 양지의 사람 답게 눈을 바르게 뜨고, 눈물을 두어 방울 흘리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 라더는 검은 정장에 튄 붉은 얼룩을 지워내지 못했다. 그렇게 찬란하게 살아온 사람의 흔적이란 그런 법이다.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그런 것. 라더는 제 피가 과연 그 정도의 의미가 있을까 궁금했다. 그냥 손끝으로 쓸어 지워버릴 수 있는 얼룩일 뿐 아닌가. 제 피와 그 사람의 피는, 더 나아가 다른 양지의 사람들 몸 속의 피는 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라더는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쓴 맛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비라도 왔으면 좋을 뻔 했다. 모든 게 다 뒤엉켜 바닥에 흘러버리게.

라더는 달렸다. 원래대로라면 사옥으로 복귀해야만 했지만, 예상 시간보다 일찍 처리한 김에 밖에서 조금 방황하고 싶었다. 이 냄새를 골목의 어두운 바람에 씻어버리고 싶었다.

*

입 안에 비릿한 것이 흩어졌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더니, 흐를 때의 감촉을 생각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공룡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입 안에 고인 것을 퉤 뱉어내고 나니 다시 눈 앞이 바로 보였다. 더러운 바닥과, 낙서로 얼룩진 벽.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더러운 것들과 그 사이로 뛰어오는 하얀 귀를 가진 친구.

"공룡아, 너 괜찮아? 미안해. 누구라도 불러오려고 했는데…."
"뭘 불러와. 아무도 안 도와줄 게 뻔한데."
"그래도…."

나 안 일으켜 줄 거야? 공룡이 손을 먼저 내밀었다. 수현이 머뭇거리다가 붙잡았다. 벽에 기대어 멍 들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껌뻑였다. 큰일났네. 이렇게 얼굴에 멍이 난 녀석을 받아주는 곳은 없을텐데. 수현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웃었다. 나 일자리 구했어. 계약서도 없고, 돈을 많이 받지도 못하지만…. 웃으며 얇은 지폐 뭉치를 건넸다. 일주일 정도는 충분하겠지? 공룡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성 안에 라더를 두고 도망쳐 나온 뒤, 그들은 도망치듯 생각에 잠겼다. 분명 죽었을 거다. 그리고 어쩌면, 라더의 죽음은 라더를 그 안에 버려두고 도망쳐나온 우리들의 책임일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어느 날 수현이 말했다. 우리,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 우리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보면 안 될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우리끼리 어떻게든 살아보자. 라더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모두가 동의했지만 한번 밑에서 기던 것이 두 발로 일어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고 했다. 그게 총구 속에 두고 나온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수현이 공룡을 부축했다. 별종 아니랄까봐. 혹시 부담이 갈까 벽에 몸을 의지하려 하는 공룡의 어깨를 그대로 쥐어 제 쪽으로 당겼다. 아, 꼴 사납게. 농담하는 머리를 강하지 않게 툭 쳤다.

*

주머니에 총이 있었지만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존재를 상기시키려는 듯 몇번이고 덜그럭거리며 무게감을 내세웠지만, 도리어 방해된다는 듯 자켓 째로 벗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암묵적인 선이었다. 그 이상 넘으면, 아무도 돌이킬 수 없음을 모두가 알았다.

"너랑 이렇게 주먹다짐 하는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10년은 더 됐지?"

비릿하게 웃는 입술 사이로 붉은 기가 도는 날카로운 치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더는 제 표정도 공룡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때 눈치챘다. 공룡은 여느 때와 같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라더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주먹다짐 조금 한다고 모든 게 풀리고 절친한 친구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버렸다. 그걸 알면서도 다시 손을 뻗었다.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보고 싶어 손을 뻗었다. 다시 한 번 몸이 벽에 들이받혔다. 이번에는 라더가 우위였다.

"너는 왜 한 순간도 진지하지를 못하냐."
"내가? 난 언제나 진지했는데."

또 농담하고 있잖아. 라더가 입을 열려는 찰나 몸 사이 빈 공간으로 거세게 주먹이 들어와 박혔다. 고개를 젖혔으나 더 큰 빈 공간이 생겼다. 공룡은 그 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길거리 싸움에서 으레 하던 대로, 아주 작은 틈으로 파고들었다. 등이 포장되지 않은 까슬한 바닥에 그대로 긁혔다. 이를 악 물자 다시 시선이 뒤로 꺾였다.

"라더야."

*

"라더야."

공룡은 제 눈을 의심했다. 제가 부르는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골목으로 뛰었다. 새빨간 머리칼이 골목 그림자 틈새로 사라지려는 걸 급하게 붙잡았다.

"라더 너 맞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껴안았다. 제 눈 앞의 사람이 실체가 있는 것임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뒤늦게 뒤편에서 따라온 수현도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비릿한 냄새가 났으나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게 나는 냄새는 구역질 나는 흙탕물이나 담배 꽁초 냄새, 간혹 스스로 흘리거나 묻은 피 냄새 뿐이었으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언젠가와 같은 온기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라더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뒤엉켰다. 라더가 왜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나 궁금했지만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대도 그들은 여기 함께 있었다. 공룡은 그것으로 모든 게 다 잘 풀리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어느 정도 눈물이 멈추고 몸이 떨어지자 라더는 고개를 숙였다. 공룡이 라더의 손을 붙잡았다.

*

"우리, 이제 새 삶을 살 거야."
"…새 삶?"
"이제 도둑질도 그만둘 거고, 일해서 집도 살 거야. 제대로 공부도 하고, 또…."

라더는 제 손에 흥건히 묻은 붉은 죄악이 해맑게 미래를 이야기하는 공룡에게 옮겨갈까 급하게 손을 빼냈다. 공룡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더는 시선을 피했다. 라더는 제가 해온 일들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미 손이 더럽혀졌음을 알았다. 그것을 모른 척 하고, 공룡과 수현이 만들어나갈 새 삶에 뻔뻔하게 녹아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힘겹게 말이 삐져나왔다. 미안. 나는 못할 것 같다.

*

공룡의 표정이 굳었다. 왜? 미안. 나는, …. 그제서야 공룡의 눈에 번듯하게 차려입은 라더의 정장이 들어왔다. 온통 검은색이라 눈에 띄진 않았지만, 붉은 얼룩 역시 있었다. 조금 구겨졌을 뿐 멀끔한 차림새와 붉은 얼룩이 공존하는 것은 단 한 종류밖에 없었고, 공룡은 밑바닥에서 굴러먹은 만큼 그 의미를 아주 잘 알았다.

"너 한 탕 했구나."
"…."

어금니가 바득 갈렸다.

"너 대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공룡아. 나 가봐야할 거 같다."
"너, 지금 이 밑바닥에서 한 자리 잡았다고 지금."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수현이 급하게 공룡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라더가 몸을 뒤로 뺐다. 시야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 공룡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뱉어냈다. 너 지금, 한 자리 얻은 거 잃기 싫은 거잖아. 다시 우리랑 어중간한 바닥에서 굴러먹기는 싫다는 거잖아! 수현이 낑낑거리며 애를 썼다.

"라더야. 너 가. 내가 말릴게. 너 가."
"…나는,"
"가야한다며. 나중에,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 이야기하자. 공룡이는 내가…."
"어딜 가!!"

수현이 어떻게든 공룡을 밀어 벽에 고정시켰다. 도망치듯 달리는 라더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렇게 평생 시궁창에 처박혀서 살아. 시궁창 밑바닥이 천장인 줄 알면서 그렇게 살아!!"

*

겨울 즈음이라 그런가. 금방 노을이 졌다. 푸른색이 붉은색과 섞여 오묘한 빛깔을 만들어냈다. 입 안에 고인 붉은 덩어리를 옆으로 뱉어냈다.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사라졌다. 멍하니 구름이 흘러가는 꼴을 보고만 있었다. 시뮬의 문이 열리고 잠시 짐을 정리하러 나온 하율이 라더를 먼저 발견하고 놀라 다시 바 안으로 들어갔다. 머잖아 레쏘가 나와 라더를 겨우 들쳐매고 바 안에 앉혔다. 멍한 정신이 그제서야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사장님, 저희 보스께 연락 좀 넣어주시겠어요."

겨우 한 마디를 내뱉고는 까무룩 눈을 감았다. 싸움의 여파 때문이 아니었다. 몸 보다는 저 안쪽 어딘가가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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