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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14)

14. 별 거 아닌

"생각보다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옛날 친구를 만나서."

도르르륵, 각별이 의자를 돌렸다. 공룡의 얼굴 곳곳에 난 멍과, 누가 봐도 주먹질 한 번 거하게 하고 온 손등의 핏줄. 각별이 우스개소리를 건넸다. 너 레쏘 패고 온 건 아니지. 내가 그렇게 앞뒤 없는 놈으로 보여? 공룡이 화답하며 실없이 웃었다. 치아에 긁힌 입 안쪽이 움직일 때마다 따갑고 아팠다. 각별이 책상 위의 펜을 손끝으로 살짝 세워 돌렸다.

"수현이가 뭐래?"
"잠뜰이 일을 꾸미고 있어. 대체 뭘 원하고 그러는 지는 모르겠지만."
"우재는."
"우재는 한동안 조용할 거야. 그 쪽도 머리가 있으면 더 나대지는 못하겠지."

그건 조금 다행이네. 공룡은 책상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올려져있던 종이 몇 장이 몸 밑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났지만, 각별이 저지하지 않았으니 그리 중요한 건 아니리라. 둥둥 뜬 다리를 꼬아 몸 앞으로 가져왔다. 긴장이 풀렸는지 눈이 꿈뻑꿈뻑 감겼다. 아주 느이 집 안방이지. 각별이 혀를 찼다.

"… 수현이는 어땠어."
"멀쩡해. 먼저 퇴근하라고 보냈어."
"다행이네. 그래도 이제 그런 일 걔 시키지 마. 안 맞는 일인 거 알잖아."

각별이 한숨을 후 내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공룡은 어찌할 틈 없이 몰려오는 피로를 이겨내려 두 팔을 허공으로 쫙 뻗었다. 눈을 꿈뻑이는 틈새로 각별의 노란 눈동자가 예고도 없이 침입해 들어왔다. 헛숨이 들어와 딸꾹질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각별의 눈은 늘 그랬다. 아무리 위아래 없이 구는 공룡이라도 그 눈 앞에서 긴장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럴 때마다 공룡은 밑바닥의 수장이라는 위치가, 그 위치에 앉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애초에 태생이 다른 사람이란, 이런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왜."

그래도 공룡은 그에 맞설 깡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위안거리였다. 쫄아도 쫀 티를 내지 않는 것. 그게 밑바닥 사람의 기본 소양이었고 공룡은 그것을 아주 잘 해냈다.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대는 사람이었다.

각별도 그걸 알았다. 공룡이 어지간해서는 짓눌리지 않는 사람임을 알기에 곁에 두었고 그렇기에 쉬이 목줄을 풀었다. 각별은 밑바닥에서 살아온 세월 답게 사람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풀어준 목줄을 언제 다시 채워야하는 지도, 아주 잘 알았다.

"언제까지 싸고 돌 거야."
"싸고 도는 게 아니라 효율적으로 하자는 거지. 수현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이나 잘 하면 되는 거야. 그게 걔한테 맞아."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기왕 이렇게 된 거 10년은 채워주자. 정이 있는데."
"정?"

아차. 입을 다물었다. 각별이 코웃음을 쳤다. 정을 논할 곳이 아니라는 건 네가 제일 잘 알텐데 그런 소리를 하네. 어느새 뱀처럼 어깨에 올라온 손이 자켓 아래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압을 주었다. 공룡은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이미 터진 입 안쪽을 다시 찔러 비릿한 냄새를 풍겼지만 절대 입을 벌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일 지언정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게 각별에게 부리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의 주름이 약하게 펴지고 의자가 도르륵, 굴러 원 위치로 돌아갔다.

"… 됐어. 나가봐. 생각 좀 해 보고, 나중에 부르지."

소름끼치는 경첩 소리가 멎어들고 나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와중에 경첩에 기름칠 좀 하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우스웠다. 공룡은 더 목을 죄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목 언저리를 풀어헤쳤다. 당연하게 해소되는 것은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가 오갔길래 저렇게 난리람. 헛기침을 내뱉으며 불이 껌뻑 껌뻑하는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사무실로 가야하나. 괜히 그러긴 싫은데. 잡생각을 지우기에 최적은 옥상인데. 시덥잖은 생각 틈새로, 반대편에서 티티가 걸어왔다. 각별의 호출을 받은 모양이었다. 붙잡아 세워 시간을 지체하게 만들 수도 있겠으나 더 신경을 거스르는 건 아무리 공룡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짓궃은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티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할 말 있으신가요."
"아뇨, 아뇨. 각별님이 부른거죠? 어서 가세요. 많이 빡쳤더라."
"……."

티티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남기고는 마저 걸어 복도 귀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공룡도 입가에 걸린 웃음을 거두었다. 정이고 나발이고. 우스개소리로도 입에 올릴 단어는 아니었다. 이럴 때마다 뼈저리게 실감했다. 지독한 충성과 이득을 보고 움직이는, 이 조직이라는 그물망이 얼마나 날카롭고 옅은지.

"…나도 조기퇴근이나 할까."

공룡에게는 숨 쉴 곳이 필요했다. 그게 어디든 간에 이 곳은 아니었다.

*

"…그래서, 일단 덕개는 먼저 퇴근시키고 숙소로 보냈거든요."
"어, 잘했네. 또."
"필립이요."

어. 잠뜰이 구겨진 미간을 문질러 눌렀다.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하필 이럴 때. 또니가 옆에 찰싹 붙어 말을 이었다. 그 녀석 뭔가 알고 있는 눈치던데요. 당연한 말이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구 세대의 잔재로써 잠뜰의 밑에 전리품처럼 남아있던 날들이 벌써 몇 해인가. 잠뜰의 생각이야 그 눈치로 훤히 꿰고 있겠지. 다만 행동을 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잠뜰이 아는 필립은 결코 행동하지 않았다. 알아도 침묵했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로 두었다. 그런 필립이, 움직였다. 수면에 조약돌 하나를 던졌다.

"불러올까요. 제 말은 안 듣던데 아무래도 보스가 직접…."
"…아냐. 부를 일 있으면 내가 부를게. 돌아가서 일 해."
"근데요, 보스."
"왜."
"덕개 어떻게 생각하세요?"

잠뜰이 고개를 들었다. 또니는 특유의 푸르고 곧은 눈으로 잠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밑바닥에 어울리지 않는 하늘이나 바다와 비슷한 깊이의 눈. 잠뜰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니의 순수함이 지워지지 않은 눈 앞에서는 도저히 말을 꾸며낼 수가 없었던 탓이다.

"갑자기 그걸 왜 물어."
"필립이가 이상한 말을 했어요. 신뢰는 있어야만 깨질 수 있는 거라고."
"……."
"덕개 믿으셨던 거 맞죠?"
"나는 너희들 다 믿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일 해."

또니가 고개를 까딱 하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넓은 사무실 안에 잠뜰 혼자 남았다.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종이뭉치들과 강제로 열린 서랍 가운데에 혼자 남았다. 어리긴. 뒤지려거든 정리라도 하고 갔어야지. 열린 서랍을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닫았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사무실 벽에 맞아 공간을 채웠다. 잠뜰은 괜스레 전부 닫힌 서랍을 발로 한번 툭 찼다. 안을 가득 채운 종이뭉치들이 일정한 소리를 냈다. 바스락, 바스락.

잠뜰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한 두 번째 계획도 있었다.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어떻게 해야할지도 다 머릿속에 있었다. 잠뜰은 책상 위에 널브러져있던 이면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펜을 꺼내들고 글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상에 남길 마지막 수기가 될 지도 모를 글을.

사무실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전화기가 때르릉,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잠뜰님, 접니다. 이리로 와주셔야할 것 같아서요. 레쏘였다.

*

"당신들 말이 맞았어요."

뒤통수를 골목 벽에 처박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한 응어리가 풀리질 않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완벽히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원인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영영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원인을 어찌 없애야할 지 알 수 없으니 아마 영원히 뇌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덕개는 봇물이 터져 답답한 마음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왜 이 사람에게인가. 또니도, 필립도 아닌 이 사람에게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도 의문을 가졌다.

"이제 어떡하죠. 나는 갈 곳이 없어요. 보스 계획대로 모든 게 진행된다면, 나는 결국…."

달깍, 골목 저편의 바 네온사인이 빛을 냈다. 그림자에 가려져있던 수현의 얼굴이 보라색 빛을 받아 표정을 드러냈다. 일자로 다물려있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부드럽게. 당혹감에 빠진 덕개에게는 아주 작은 미소도 동의와 지지의 표시로 보였다. 수현이 입을 열었다. 저랑 같이 가실래요?

*

몸 속에 들어가는 알코올이 정신을 조금씩 빼앗아갔다. 목구멍과 그에 이어진 심장이 타들어가는 듯 아팠다. 지워지는 것은 겉의 멍 뿐이었다. 레쏘가 곁에 앉았다. 곧 오실거랍니다. 뻐근한 고개를 까딱였다. 잠뜰이 오면 뭐라고 설명해야할 지 정리했다. 처음, Who부터 막히고 말았다. 누구랑 싸웠다고 해야하지. 공룡이라고 제대로 말해야하나부터 시작해서, What.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도 말해야하나. 잠뜰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지만 미처 알려주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입가에서 깔짝거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뭘. 알코올이 들어간 머리는 모든 키워드를 난잡하게 섞어 진탕으로 만들었다. 아, 작은 한숨이 빠져나가며 그대로 머리가 멈췄다. 그저 잠뜰이 아무것도 묻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가 아는 잠뜰은 섣불리 묻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 '아는' 것에 의존하기에는 어딘가 걸렸다.

딸랑, 바 문 위쪽에 작게 달려있던 종이 울렸다. 레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사장님. 민폐를 끼쳤네. 뭘요.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모든 대화가 또렷하게 들렸다. 술기운이 음악소리와 잔 튕기는 소리를 알아서 지웠다. 인사를 마친 잠뜰이 라더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둣발 소리. 11년 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던 그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다가 어느 정도에서 멈췄다. 잠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라더 잠들었어요?"
"아마도요. 술을 좀 먹였습니다."
"…별 거 아닌 일이긴 한데, 의논해야할 게 좀 있어서. 최대한 빨리."
"혹시 모르니까 안쪽으로 들어갈까요."

레쏘가 말을 마치고는 하율을 불렀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이 분 좀 봐주시고 계세요. 두 구둣발 소리가 섞여 저 안쪽으로 옮겨갔다. 라더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떠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

격렬했던 총격전의 흔적이 항구 컨테이너 곳곳에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론은 조용했다.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밑바닥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했다. 빛을 피해 숨어든 것들에게 빛을 비춰줄 필요가 없다는 게 다수의 의견이었다. 잠깐 빛 아래로 나온다고 해도 잠깐일 뿐, 다시 제 주제를 알고 어둠 아래로 사라질 것들이었다. 정계의 그림자는 일반인들에게 알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정치인 누군가가 암살당했다든가,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 뒤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들고 나타난다든가 하는 것들은, 그냥 그 순간 놀랍고 말 가십에 불과했다. 밑바닥이란 그렇다. 아무리 물장구를 쳐도 수면 위에는 간간히 물방울만 튀길 뿐인, 그런 세상이었다.

그러므로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별 것 아닌 일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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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정으로 인해 2~3개월 간 휴재합니다. 간간히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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