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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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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AYS : 좀비사태] 양자택일 그대는 인간인가? 끄륵, 끄르륵. 벌어진 입술 새로 인간의 것이 아닌 소리가 들렸다. 라더는 그 앞에 대충 구겨앉았다. 총구멍 사이로는 흐르는 게 없었다. 수현의 피는 온기를 받지 못한지 꽤 되어 굳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잠뜰이 그 심장에서 억지로 빼내어 섞은 피가, 수현의 몸에 흘렀던 마지막 온기였다. 라더는 수현의 눈을 감겨주어야하나 고민했다. 이미 무너지고 어질러진 얼굴에 손을 대려니 조금 망설여지기야 했다. 입에서 피가래가 끓었다. "… 왜." 끄륵거리는 소리 위로 작지만 확실히 분간할 수 있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라더는 눈앞에서 손을 멈췄다. 뭐야. 아직 말이 나와? 하는 순수한 의문이 막을 틈 없이 새어나왔다. 수현이 이미 썩어버린 팔을 들어 라더의 손목을 쥐었다. 응어리 진 것들이 주륵 ..
[심판자] 제1법칙 뜰리오트로프의 규칙을 준수하세요. 1. 절대로… 손가락 하나로 선고가 내려진다. 범죄자는 발악하지 않는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증거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말 뿐인 부정은 기록을 이길 수 없다. 몇번씩 잡혀들어온 범죄자의 경우는 더 쉽다. 그들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결코 저 굳게 닫힌 셔터가 도로 열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발 조금이나마 형량을 줄여주십사 애원하는 것 외에는, 그들 입에서 나올 말은 없다. 라더는 감시자가 천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사사로운 사족을 달지 않았으며, 신입 감시자들이 흔히 그러듯 물질에 목을 메지도 않았고, 눈썰미도 좋았다. 실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실적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옆 자리가 ..
[밤을 보는 눈] 신화는 작별을 고하고 믿을 구석이 필요 없어진 시대에 "벌써 지친 것이냐." 땀과 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이 계속 시야를 가렸다. 갈색으로 흐릿하게 퍼져나간 시야 사이로 푸른 것들이 점멸했다. 잠뜰은 얼굴에 붙어대는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치웠다. 라더가 다시 손끝을 돌렸다. 곳곳에 흩어져있던 물방울들이 다시 한 곳으로 모였다. 검을 고쳐쥐었다. 물기에 손잡이가 계속 미끄러졌다. 악에 받쳐 입을 열었다. 아뇨, 아직입니다. 라더의 입꼬리가 옅게 호선을 그렸다. "오냐, 그럼 어서 덤비거라." 물기둥이 청명한 소리와 함께 솟아올랐다. * 그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기억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믿을 구석이 필요해진 그 순간부터 그는 그 곳에 있었다. 본디 작은 미물이었을지 모르는 그는 그렇게 신이 되었다. ..
[이세계 삼남매] 모순 이미 날아간 화살은 한없이 과녁에 가까워지기만 할 뿐 *교통사고와 죽음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내 손을 벗어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양궁을 시작한 이래 제일 많이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한 발 한 발 신중해라. 이미 쏜 화살에 발목잡혀 다음 것을 놓치지 말아라. 잠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뜰은 제가 이미 쏘아보낸 화살들에게는 아무런 집착도 하지 않았다. 흘러가면 끊어내고 흘러가면 끊어냈다. 잠뜰은, 제가 양궁을 하는 동안 이미 과녁에 꽂혀버린 화살에 집착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행복해?" 잠뜰은 제가 쏘아보낸 화살이 제 손끝은 물론이고 제 친구의 심장마저 꿰뚫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후회했다. 아주 강한 바람이 불어 제가 쏜 화살을 다시..
[초능력 세계 여행] 책임 수몰된 어린 날들에게 IPS 사옥 내에서 가장 늦게 불이 꺼지는 곳은 국장의 사무실이었다. 각별은 늘 모든 사람들이 집에 돌아간 이른 새벽까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곤 했다. 그의 강박에 가까운 책임감이 서류들을 두 번 세 번 확인하지 않고서는 차마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없게 했다. 돌아갈 집이 딱히 없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거주지로 등록된 자택은 있었지만, 딱히 마음을 붙이고 쉴 집은 없었다. 각별은 침대에 몸을 뉘여도 손에 서류가 붙들려 있을 것을 잘 알았다. 그럴 바에는 사무실에 하루 종일 붙어있는 게 낫다는 것도. 블라인드 틈새로 새벽의 하얀 햇살이 밀려들었다. 안 그래도 새하얀 종이와 새하얀 조명에 뻐근해진 눈두덩이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각별은 하얀색에 내성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하얗고..
[전설 합작] 그 해변에는 인어가 살고 있대 뜰팁 전설 합작 참여글입니다. 합작 링크 : 글 : 옌(@YEN_DdeulT) / 그림 : DUA (@dua_1115) 아이는 종종 환각을 본다. 정확하게는 상상을 실제처럼 보는 것이지만, 무엇이든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제로 본다는 점에서 환각과 다를 바 없다.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기에 상상과 세상의 경계에서 자유롭다. 상상의 종류는 다양하다. 책에서 보았던 요정, 침대 밑에 떨어져있던 인형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괴물, 또는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속 진위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라더의 환각은 이야기를 타고 왔다. * 푸른 지붕들이 늘어서있는 작은 마을의 오솔길로 새어나가는 바람을 따라가다보면 금방 파도소리가 들렸다. 하얀 모래들이 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포말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해..
[황금사과] 커튼콜 비록 조잡하고 한심한 연극이었지만, 밤의 지루함을 덜어내기에는 손색이 없었소. _ 셰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 각별은 자신의 삶이 꼭 연극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운명의 힘 앞에 발버둥치다 무력하게 잡아먹히고 마는 그리스 비극.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신의 악의는 믿었다. 여느 신화와 비극들에서 그렇듯이 신은 언제나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얽어놓았다. 하필 덕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수희라는 게, 하필 공룡의 첫사랑이 수희였다는 게, 하필 세준이 죽고 그 자리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라더였다는 게, 하필 수현과 잠뜰이 원하는 것을 가진 게 덕개였다는 게. 거대한 악의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각별은 각본가에게 묻고 싶었다. 왜 신화 속 영웅들처럼 용맹하지도, 의지가 충만..
[하이틴] 명멸 잠뜰TV 하이틴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합작 링크 : highteen.creatorlink.net/ BGM : youtu.be/YFBR0bJTKWw깜빡. 어떤 일들은 정말 난데없이 일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케일이 큰 일일 수록 그렇다. 한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큰일은 정말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고 냅다 내리꽂힌다. 징조가 보임에도 애써 외면한 결과인지도 모르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러나저러나 날벼락이다. 각별의 실종이 그랬다. 각별의 눈 색을 닮은 샛노란 꽃다발이 검은 아스팔트 위로 흩뿌려졌던 게 기억이 났다. 잠뜰아. 혹시 각별이가 갈 만한 곳 모르니. 멍한 머리를 말들이 헤집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단순히 집에 제 시간에 안 들어온 걸로 실종신고를 하기에는 이르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