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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밤을 보는 눈] 신화는 작별을 고하고

믿을 구석이 필요 없어진 시대에

"벌써 지친 것이냐."

땀과 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이 계속 시야를 가렸다. 갈색으로 흐릿하게 퍼져나간 시야 사이로 푸른 것들이 점멸했다. 잠뜰은 얼굴에 붙어대는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치웠다. 라더가 다시 손끝을 돌렸다. 곳곳에 흩어져있던 물방울들이 다시 한 곳으로 모였다. 검을 고쳐쥐었다. 물기에 손잡이가 계속 미끄러졌다. 악에 받쳐 입을 열었다. 아뇨, 아직입니다. 라더의 입꼬리가 옅게 호선을 그렸다.

"오냐, 그럼 어서 덤비거라."

물기둥이 청명한 소리와 함께 솟아올랐다.


*


그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기억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믿을 구석이 필요해진 그 순간부터 그는 그 곳에 있었다. 본디 작은 미물이었을지 모르는 그는 그렇게 신이 되었다. 물을 흐르게하고 마른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그런 신이 되었다.

"야괴가 나타났어요?"

잠뜰이 잠결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끝으로 대충 빗어넘겼다. 야괴가 날뛰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사당 안에는 라더 뿐이었다. 사당을 관리하던 관리인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라더 만이 널찍한 사당 앞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인간의 것을 본뜬 몸이 채우고 남은 자리는 위압감이 들어차 함부로 숨을 뱉어내기도 어려웠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돌아보았다. 잠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왔느냐."
"예, 근데…."

사당의 자잘하게 갈린 돌바닥 틈새에 물이 고여있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물의 양으로 보아 라더의 힘으로 어렵지 않게 물릴 수 있는 야괴였음이 분명했다. 잠뜰을 굳이 부를 필요도 없고, 굳이 불렀더라도 도움이 안 되었을 정도의 야괴. 잠뜰은 의아함을 안고 라더를 바라보았다. 상처 하나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선 라더를 보았다. 라더가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려 잠뜰을 온전히 마주했다. 묘한 일렁거림이 몸 주변을 타고 흘렀다. 잠뜰은 눈을 껌뻑였다. 이상하다. 오늘은 단 거 안 먹었는데. 원래 저렇게…

"… 내가 너를 왜 불렀는지, 알겠느냐."

라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뇨. 알았으면 이렇게 멍하니 있지 않았겠지요. 잠뜰은 그리 퉁명스럽게 답하고픈 충동을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라더의 목소리가 유달리 가라앉아있는 것이 신경쓰였다. 묘하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힘들이 약해진 것도 같았다. 위압감으로 빈 공간을 채워도 어쩔 수 없이 비어버리는 곳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자리에 어떤 악의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라더가 조금이라도 어긋난 길을 가게 된다면, 그로 인해 잠뜰과 싸워야만 한다면. 둘 모두에게 그만큼 고역인 일은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곁에 조언을 해줄 각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잠뜰은 라더에게 물어볼 여러가지 질문을 찾다가, 결국 정공법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약해지셨네요."
"알아보는구나."
"왜요?"

아무 이유도 없다. 라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 일도 없기에 이리 약해지는 것이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툭 던지고는 잠뜰을 바라보았다. 잠뜰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당신은 끝까지 강하게 남아있을 줄 알았다. 한 마을의, 한 지역의 수호령이라면 응당 그럴 줄 알았다. 야괴가 나타나지도 않고, 더 이상 해광의 문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당연히 당신은 굳건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으리라 믿었다.

잠뜰은 눈을 부볐다. 라더의 몸이 일렁이는 것 같은 환시가 보였다. 물방울이 툭 떨어진 듯이 작은 파동이 일어 전신을 흔들어대는 환각이 보였다. 라더는 그 파동의 주기에 맞추어 어느새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바닥에 흥건히 부어져 이내 흡수되고 말라붙는 물처럼, 그리 될 것만 같았다.

"왜요?"

다시 물었다. 납득이 가는 답변이 나올때까지 그리 같은 질문을 반복할 작정이었다. 이제 이 앞에 놓인 것은 평화일진대, 왜. 평화가 도리어 당신을 약하게 만드는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호령이라면, 평화를 먹고 강해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힘을 빼앗겨 약해졌던 이유는 평화가 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나. 잠뜰은 다시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 일도 없기 때문에."

같은 답이 먼저 정적을 채우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왜요."

라더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잠뜰은 그런 표정을 하고 일찌감치 물에 녹아 사라진 이들을 알았다. 왜 모든 것들은, 의지하게 만든 모든 것들은 알 수 없는 표정과 결의를 굳히고 그리 홀연히 녹아 사라져버리는가. 잠뜰은 주먹을 꾹 쥐었다. 왜요.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은 거잖아요. 그런데 왜요? 말끝이 올라가고, 소리가 일렁이다가 차분히 흩어졌다. 잠뜰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보호받고, 아무 것도 몰라도 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라더는 가만, 잠뜰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표정이었겠구나. 물 속에서 바라본 그 표정이 딱 이랬겠구나. 하지만 라더는 이미 결심을 내렸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잠뜰 역시 그것을 읽어냈다.

"애 취급 하지 마세요. 나도 알아야겠으니까. 말없이 혼자 알고, 그걸 이유로 사라져버리지 말라구요."

날카로운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이 말에 꽂혀 라더가 멈춰서길 바랐다. 저 일렁거리는 파동을, 어떻게든 멈춰세울 수 있기를. 라더는 가만히 눈을 마주하다가, 텅 빈 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참 한적하지 않으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꽤 되었다. 멍하니 읊는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슬픔인지 추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습한 향이 났다. 잠뜰아, 너도 알게다. 뒤이은 목소리 역시, 축축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신을 원하지 않아."

*

그 날 이후로 세상은 조용했다. 간간히 길 잃고 이승을 떠도는 범혼들이 있었지만, 야괴가 되어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죽음과 멀어졌고, 해광은 일상을 찾았다. 누구도 귀신에 홀렸다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누구도 퇴마사를 찾지 않게 되었다.

그런 세상에서 잠뜰은 살아갔다. 가끔 들어오는 퇴마라기도 뭐한, 잡다한 범혼을 돌려보내는 일 외에는 슬슬 일거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공룡이 그렇게 사라졌으니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었을 야괴들도 길을 잃고 몸을 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면 서왕모가 해광에 무언가 조치를 취했거나. 명수는 평범하게 카페를 운영하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고, 수현의 사진기에는 더 이상 이상한 무언가가 찍히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미신을 믿지 않았다. 언젠가 그런 시대가 오고 모든 믿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 저 기억 너머로 사라지고 말리라는 건 알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 시대를 열었다. 여전히 기도하던 이들은 신의 곁으로 갔고, 신의 이야기는 그렇게 잊혀졌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도 믿지 않는 신은 힘을 잃지. 세상을 만들고 관리하는 이들이라면 필요없겠지만, 나는 믿음과 바람에서 나온 존재다."

라더의 손에서 가볍게 물방울이 톡, 톡 솟아올라 터졌다. 일렁거리는 기운이 예전만 못하다. 잠뜰은 그제야 사당 바닥을 흥건히 적신 물의 원인을 알았다. 당신은, 아마. 무서웠으리라.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 다시 기어올라왔을 때 당신이 더 이상 없을까 무서웠으리라. 그래서, 어떻게든 사라져가는 힘을 붙잡고 애를 썼으리라. 어떻게든 힘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긴 발악 끝에 찾은 것이, 잠뜰이었다. 한 차례 야괴들로부터 세상을 구한 적이 있는 아이. 월광검의 선택을 받은 아이. 잃는다는 것의 무게를 알고 있기에, 그만큼 따뜻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아이.

라더가 주먹을 말아쥐자 잠뜰과 가장 가까이 있던 물웅덩이가 크게 진동하더니 물기둥이 되어 솟았다. 잠뜰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월광검을 뽑아들었다. 습기에 젖은 손잡이가 미끄러졌다. 평화에 익숙해져 검을 잡지 않은 탓도 컸다. 라더의 주변에 물의 고리가 자리잡고, 그것보다 배는 깊고 푸르른 눈이 잠뜰을 향했다.

"야괴들은 나와 다르다. 그것들은 믿음을 먹고 자라지 않아. 두려움과 악이 있다면 언제든 기어올라와 세상을 흔들어놓을게야."
"……."
"내가 없게 된다면, 그것들을 보고 막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너 뿐이다. 다른 누군가가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알고 있습니다."
"미안하구나. 네게 더 이별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늘."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물의 구가 사당 전체를 감쌌다. 잠뜰은 월광검을 쥐고, 라더에게 바로 겨누었다. 라더의 입꼬리에 웃음이 번졌다. 물방울이 물기둥이 되어 날카롭게 벼려졌다.

"한동안 네 수련상대는 내가 되어주마. 아무리 힘이 약해지고있다한들 방심하지 않길 바란다."

허수아비들 치는 것도 지루했는데 잘됐네요. 잠뜰은 그리 말하고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제 주변을 거품처럼 감싸는 물방울들을 베어내고, 정면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물기둥을 뚫었다. 라더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물방울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햇살이 따뜻해 자연히 무지개가 생겼다. 영원이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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