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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초능력 세계 여행] 책임

수몰된 어린 날들에게


IPS 사옥 내에서 가장 늦게 불이 꺼지는 곳은 국장의 사무실이었다. 각별은 늘 모든 사람들이 집에 돌아간 이른 새벽까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곤 했다. 그의 강박에 가까운 책임감이 서류들을 두 번 세 번 확인하지 않고서는 차마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없게 했다. 돌아갈 집이 딱히 없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거주지로 등록된 자택은 있었지만, 딱히 마음을 붙이고 쉴 집은 없었다. 각별은 침대에 몸을 뉘여도 손에 서류가 붙들려 있을 것을 잘 알았다. 그럴 바에는 사무실에 하루 종일 붙어있는 게 낫다는 것도. 블라인드 틈새로 새벽의 하얀 햇살이 밀려들었다. 안 그래도 새하얀 종이와 새하얀 조명에 뻐근해진 눈두덩이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각별은 하얀색에 내성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하얗고 검은 것들 사이에 둘러싸여있었지만, 늘 새로운 피로와 불안을 만들어냈다. 사람을 하얀 방에 가두어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미쳐버린다고 하던가. 불현듯 그런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실없이 웃었다. 쉴 때가 되었나. 새벽 여섯 시에 가까워진 전자시계의 빨간 숫자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밤새 서류에 몰두해 멍하니 회전하기만 하던 머리가 뇌 저 편 구석에서 사견을 찾아 입 밖으로 끌어냈다. 10시간 이상 말하지 않은 성대가 오랜만의 접촉이 어색해 작은 쇳소리를 내며 긁혔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간만의 대상 없는 발화를 허용해주지 않겠다는 듯 똑똑똑, 노크 소리가 말문을 막았다.

"…이 시간에 누구십니까?"
"역시 계셨네요, 국장님. 수현이에요."

들어오라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하얀 귀가 먼저 들어와 쫑긋거렸다. 눈을 문질러 피로를 걷어냈다. 수현 특유의 웃는 얼굴, 자주 입는 보라색 가디건이 차례로 다가왔다. 똑같이 웃어줘야하나. 각별은 시간이 쌓여 무겁게 내려간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수현이 손사래를 쳤다. 편하게 있어도 된다는 신호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이상하게 눈이 떠지더라고요."

수현은 서류로 난잡하게 어지럽혀진 책상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국장님, 또 밤 새신 거죠? 말을 하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뒤쪽 창문으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걷었다. 하나하나 불이 켜지기 시작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별이 멋쩍게 대꾸했다. 어쩌다보니요. 이제 정리하고 조금 쉬려고 했습니다. 딱딱한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수현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이쯤되면 익숙하게 흘릴 만도 한데 늘 귀에 곧이곧대로 꽂혔다. 수면시간의 중요성부터, 일의 효율성 문제, 아이들도 밤을 새면 혼내는데 국장님이라고 안 그러실 줄 아느냐는 농담 섞인 질책.

"하여간, 연구소에 있을 때도 몸이 약해보여서 많이 걱정했…."

아차, 수현이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각별을 쳐다보았다. 건강에 대한 염려를 하던 중, 저도 모르게 그려진 실험체 알파의 얼굴을 보고 생각할 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제 말이 각별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도로 불러일으키는 스위치가 되었을까 전전긍긍하며 표정을 살폈다. 각별에게 그 생각이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분위기를 푸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각별의 몫이었다.

"괜찮습니다. 사과하실 필요도 없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요."

각별이 아무렇지 않게 책상 위에 엎어진 종이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각별의 눈은 곧았다. 과거의 어느 곳에도 묶여있지 않았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이 변하셨네요.

*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한 일을 하는 거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현은 두 말을 듣고 자랐다. 너는 세상에 둘도 없을 인재야.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한 일을 하는 거야. 장난감 대신 서류와 펜을 들었고 게임기 버튼 대신 키보드를 두드렸다. 적당히 나이가 차자 연구소의 말단 자리를 맡을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이는 이론들이 눈 앞에서 현실화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수현은 그 일을 꽤 좋아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이 세상을 위해서. 그렇기에 눈을 돌렸다. 눈 앞에서 불가능을 몸소 받아내는, 저 보다 기껏해야 서너살 정도 어린 아이를 보면서도. 이 아이가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어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인류를, 이 세상을 위한 신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검고 하얀 것들 사이 형형하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를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발목을 붙잡는 찐득한 얼룩을 애써 무시하며 차트에 숫자를 적어내렸다. 이 아이가 마지막일테니까, 이 아이가, 우리의 알파이자….

베타, 감마, 델타. 한 보육원에서 데려온 이름도 가족도 없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건 가장 나이가 어린 수현의 몫이었다. 정을 붙이지 말라. 교육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격 형성을 위해서다. 발목에 들러붙어있던 얼룩이 뱃속 깊은 곳까지 기어올랐다. 팔에 갖가지 검사를 위한 주사자국을 주렁주렁 단 아이들이 어린 아이들 특유의 걱정 없는 웃음을 지으며 채 여물지 못한 목소리로 수현을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오늘은 조금 더 아팠어요. 뒤에 따라붙는 말들이, 이 어린 아이들의 여린 목소리로는 나오지 말아야만 했던 것들이 수현의 귀에 들릴 때마다 뱃속이 요동쳤다. 이 세상을 위한 일이야. 이 세상을 위한 일. 아이들의 입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알파가 떠올랐다. 이제는 차마 열리지도 못하던 그 입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수현은 알파의 방에 들렀다. 경계심 가득한 노란 눈동자를 마주하며 몇번이고 되뇌였다. 모두를 위한 일이야. 이 세상을 위해. 세상을 위해 작은 수십 개의 세상이 부서져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눈을 감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여기가 좋으세요? 감마가 말했다. 수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암흑이었다.

*

수현은 아직 알파가, 각별이 연구소에서 탈출하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요란하게 연구소 전체를 울리던 경보음, 아무 일도 아니라며 제일 먼저 아이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끌어안고 구석에 숨어있던 자신, 복도에 짙게 깔려있던 혈향과 케케묵은 연기의 냄새, 그 사이에서 붉은 안개를 이끌고 건조하게 걸어나오던 알파. 빛 없는 노란 눈동자가 싸늘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룩이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울었다. 수현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얼룩이 머리 끝까지 뒤덮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수현은 애써 입을 열었다. 끈적하게 입을 틀어막아 잘 열리지 않았다.

"…애들은, 잘못 없어. 너와 같은 아이들이야."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알파의 그림자가 잠시 흔들렸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시선을 뒤쪽으로 옮겼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발소리가 나는 쪽으로 틀어진 고개만 눈에 띄었다. 알파가 손을 들었다. 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림자가 순식간에 걷혔다. 연구원님, 괜찮으십니까? 실험체들을 옮겨. 많은 소리들이 한번에 몰려들었으나 귀가 아프지는 않았다. 모든 소리가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먹먹했다. 알파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선생님, 선생님은 여기가 좋으세요?

일이 어느정도 마무리 된 후, 수현에게 내려진 지령은 아이들과 유대를 쌓으라는 것이었다. 더 단단해진 감옥 안에서 족쇄처럼 채인 팔찌를 긁어대는 아이들의 눈이 노란 빛으로 보였다. 그 순간 머리끝까지 쌓여있던 얼룩이 심장을 잡아챘다. 이건, 아니라고.

*

좋은 쪽으로요. 수현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각별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 차올랐다. 수현이 자연스럽게 옆에 서서 서류 정리를 도왔다. 각별이 되물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각별은 종종 마음을 읽을 수 있음에도 직접 의도를 물었다. 신뢰를 확인하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수현도 그걸 알기에 숨기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좋은 어른으로 자라줘서 고마워요."

수현은 그 날 바라본 각별의 눈을 생각했다. 절망과 권태에 범벅이 되어 썩어들어간 그 눈을. 보통 그런 눈을 가진 힘이 있는 이들은 잘못된 곳을 향하곤 했다. 각별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이 붉게 터져나오고도 남을 만큼 흉터가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각별은 살아있었다. 올곧게 몸을 펴고 살아있었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살아있었다. 수현은 각별에게 찬사를 보내 마땅했다. 모든 고통을 견뎌내고 더 여린 아이들을 보호하는 좋은 어른으로 자라준 데에 감사를 표했다. 자신은 차마 변하지 못했음에 사과했다. 동시에 등을 떠밀었다. 과거의 수렁에는 본인만이 존재할테니, 각별은 이제 그만 벗어나도 된다고. 수현은 본인의 죄가 평생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들러붙어있어야함을 잘 아는 어른이었다. 심장 벽에 남아있는 검은 얼룩이 세차게 쿵쿵거렸다. 떨쳐내려고 해도 떨쳐내서는 안된다. 수현은 평생 그 무게를 견뎌내며 살아야했다. 눈앞에 아이들이 존재하는 한. 수현은 정리를 마무리하고는 시간을 보았다. 곧 아이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수현은 그리 말하고는 웃으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책임이라면 저도 같이 져야하잖아요."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각별이 손을 흔들었다. 책임, 책임이라. 천장에 매달린 하얀 전등빛이 조금 불안정해진 파장과 함께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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