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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황금사과] 커튼콜

비록 조잡하고 한심한 연극이었지만, 밤의 지루함을 덜어내기에는 손색이 없었소. _ 셰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

각별은 자신의 삶이 꼭 연극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운명의 힘 앞에 발버둥치다 무력하게 잡아먹히고 마는 그리스 비극.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신의 악의는 믿었다. 여느 신화와 비극들에서 그렇듯이 신은 언제나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얽어놓았다. 하필 덕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수희라는 게, 하필 공룡의 첫사랑이 수희였다는 게, 하필 세준이 죽고 그 자리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라더였다는 게, 하필 수현과 잠뜰이 원하는 것을 가진 게 덕개였다는 게. 거대한 악의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각별은 각본가에게 묻고 싶었다. 왜 신화 속 영웅들처럼 용맹하지도, 의지가 충만하지도 않은 자신이어야만 했냐고. 무력하게 비극의 물살에 휩쓸려가야만 하는 자신이어야만 했느냐고. 주인공도 아닌 주제에 이 모든 비극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세준의 빈 자리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곳은 연습실이었다.
아킬레우스의 투구를 대신 쓰고 나가줄 파트로클로스는 없었다. 손에 쥔 창이 헥토르의 경동맥을 뚫고 지나갈 때, 쓰러진 헥토르의 몸뚱이를 짓밟고 외칠 이름이 없었다. 전장에 나가 치열하게 싸운 이유가 되어준 이름이, 시체가 없었다. 허울만이 남았다.

꽉 짓눌린 기침이 터졌다. 각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수현이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사불란하게 수현에게 몰려들었다. 손에 단단히 쥐고 있던 창이 마룻바닥에 쾅 떨어졌으나 사람들의 발소리에 묻혔다. 창이 후두를 가격했다. 연습 중 자주 벌어지는 사소한 사고였다. 역할에 과도하게 몰입해 맞춰둔 합도 무엇도 모두 잊으면 으레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각별은 알았다. 헥토르의 목을 창으로 꿰뚫은 순간 창을 쥐고 있던 것은 아킬레우스가 아니었다. 창에 꿰뚫린 것은 헥토르가 아니었다. 진작에 무대의 마법은 깨졌다. 각별이 보고 있는 것은 화려하게 치장된 무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앗아간
, 욕망들이 집대성 된 현실이었다. 사과의 말을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헥토르의 탈을 쓴 수현이 죽어버리길 빌었다. 밧줄에 의해 성대가 짓눌려 아무 말도 못하게 된 세준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길 바랐다. 수현은 그럴 수도 있지 않냐며 눈물 고인 눈으로 싱긋 웃었다.

세준은 몇번이고 수현에게 죽었다. 각별은 몇번이고 수현을 죽였다.
세준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수현은 몇번이고 다시 살아났다. 죽은 헥토르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멀쩡하게 살아났다. 커튼콜은 마법의 시간이다. 죽고, 그 시체가 흙먼지에 뒤덮이더라도 암전 후 막이 걷히면 없던 일이 된다. 몇번의 반복 후에는 영영 없던 일이 된다. 죽은 영웅도, 박살난 성벽도. 그 자리에 돌아오지 못한 건 파트로클로스 뿐이었다. 몇번의 암전을 거친 이후에도 파트로클로스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각별은 그 빈 자리에 꽃을 두었다.

*

그라인더 날이 작은 스파크를 일으켰다. 각별은 필록테테스였고, 클리타임네스트라였으며, 확실한 아킬레우스였다. 날카롭게 갈아진 화살촉이 조명빛을 받아 빛났다. 하이라이트 넘버가 울려퍼질 차례였다. 각별은 허밍을 시작했다. 세준이 지은 라더의 가사를 입에 올리
기에는, 이 연극은 너무나 조잡하고 진부한 복수극이었다. 세준의 가사는 조금 더 화려한 입에서 흘러나와야 했다. 진실을 알고 눈이 먼 오이디푸스의 입이 아니라.

촬영 시작을 알리는 붉은 불이 들어왔다. 각별은 덤덤한 어조로 말을 뱉어냈다. 연극, 아니 연극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조잡한 촌극의 클라이맥스. 마지막 독백이 하나의 비트를 가지고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시선은 한 순간도 길을 잃지 않았고, 몸은 나무 뿌리를 박아넣은 듯이 곧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각별은 제 역할을 수행했다. 제 인생이라는 비극의 결말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제 각별은 파리스였다. 불사의 영웅의 발꿈치에 화살을 꽂아넣은, 모든 것의 근원이자 욕망에 충실했던 인간. 각별은 신화 속의 모든 살인자였다. 극의 전통에 따라, 그는 지옥에 떨어질 차례였다.

각별은 배우였다. 그들 역시 배우였다. 각별은 독이 몸 전체로 천천히 퍼져가는 이미지를 그렸다. 노력은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했다. 손끝이 차갑게 굳어갔다. 각별은 제가 갈 지옥을 그렸다. 동시에 이 암전이 걷히고 진행될 커튼콜을 그렸다.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일렬로 서 있는, 죽은 이도 죽인 이도 잊혀지는 커튼콜. 이 암전이 끝나면 박수소리가 들려오길 바랐다. 죽은 파트로클로스와 영웅들이 돌아오고 제 손에 묻은 살인자들의 영혼은 없던 일로 되길 바랐다. 그렇지 못한다면, 영영 암전이길 바랐다. 이 연극의 끝은 영영 밤이길 바랐다.

각별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유로 모르고 웃음이 나왔다. 허공에 중얼거렸다.

당신들, 배우잖아. 암전이 끝나고 커튼콜이 오길 빌어봐. 죽은 사람도 죄도 모두 사라지길.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촌극이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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