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차 창작

[밤을 보는 눈] 데자뷰

그날도 우리는 가라앉았었지

각별은 소위 말하는 죽은 듯이 잠드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의 특수성과 유달리 지치기 쉬운 체질이 공존하는 탓에 한번 잠들면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각별이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거라는 농담을 자주 했다. 그건 집에 불이 난 그 날도 다르지 않았다. 연기 냄새를 맡고 일어난 건 공룡 뿐이었다. 각별은 문틈새로 새어들어오는 연기가 숨통을 막을 때 쯤에야 눈을 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짙은 잿빛의 연기가 목구멍을 태웠다. 각별은 갓 잠에서 깨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정리했다. 몸을 낮추고, 옷소매로 입을 막고, 천천히, 당황하면 산소가 빠르게 고갈되니까. 천천히…

아, 형. 공룡이 다른 방에 있다는 게 생각났다. 잠에 취하는 자신과 달리 공룡은 예민한 편이었다. 이정도의 연기는 쉽게 알아채고 빠져나갔을 거라 생각했다. 소방서에 신고도 미리 했을 것이고, 나를 미처 깨우지 못했으니 왜 나오지 않을까 많이 걱정하고 있겠지. 서둘러 나가야한다. 아들을 잃은 지 얼마 안된 공룡이 하나 남은 가족인 동생마저 잃는다면 얼마나 상심할 지 본인으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곁에 잡아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데. 각별은 뜨거운 문고리를 붙잡았다.

불길 한 가운데에 우뚝 선 인영이 보였다. 방열복을 입고 있지 않으니 소방관은 아니다.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불에 타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저렇게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형?”

왜 안 나가고 이러고 있어. 서둘러야… 공룡의 어깨를 붙잡은 순간 몸이 앞으로 넘어가 바닥을 굴렀다. 등이 불길에 뜨겁게 달궈진 마룻바닥에 짓이겨지자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공룡은 각별의 위를 차지했다. 마룻바닥에 닿은 온 몸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어깨가 짓눌려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체격이 큰 공룡이 각별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불길은 더 거세지고, 저항한 탓에 숨은 부족했다. 흐릿흐릿한 시야 사이로 공룡의 얼굴이 보였다. 각별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짓이야, 형!!”
“우리가 벌 받는 거야.”

각별의 얼굴로 물방울이 두어 방울 떨어졌다. 열기를 잠재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공룡은 손에 꾹 쥐고 있던 카드를 내밀었다. 각별이 동희를 두고 치료하러 갔던, 리조트 붕괴 사고의 생존자 아이가 쓴 감사편지. 각별은 그제야 시야가 트여 공룡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었다.

“우리 동희도, 각별 삼촌은 역시 최고의 의사라고 고마워했겠지?”
“형.”
“내가 조금만 더 동희에게 신경을 썼었다면, 쓰러지기 전에 알아차렸다면…. 그랬다면 동희는 아직 여기에 있었을지도 몰라.”
“정신차려. 형.”
“각별아, 동희가 화가 많이 났나봐. 우리, 동희한테 가서 미안하다고 하자.”

각별은 더 저항하지 않았다. 공룡이 웃으며 각별의 위로 쓰러졌다. 한껏 웅크린 몸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검은 연기가 폐를 까맣게 태웠다. 어딘가 먼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이미 늦었다.

*

각별이 공룡의 어깨를 짓눌렀다. 공룡은 온 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으나, 벌린 입 사이로 물이 들어차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틀어막았다. 범혼은 물을 건널 수 없다고 하던가. 생각한대로, 잠뜰은 물 위로 떠오르고 공룡과 각별은 끝없이 가라앉았다. 제 몸을 관통해 올라가는 잠뜰을 확인하고 나니 공룡의 눈가가 짓무른 것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공룡은 저항을 그만두고 손을 놓았다. 빛이 닿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공룡의 입이 열렸다. 마지막 두어 방울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너를 지키지 못한 내가 밉구나.”

각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가라앉았다. 잊혀져있던 죄책감의 무게가 뒤늦게 그들을 짓눌렀다.

'2차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금사과] 커튼콜  (0) 2021.04.26
[하이틴] 명멸  (0) 2021.04.25
[하이틴] 조우  (0) 2021.02.15
[조직물] 하극상  (0) 2021.02.11
[하이틴+아포칼립스] 숨  (0) 2021.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