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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하이틴+아포칼립스] 숨

난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을 거야

*우울의 함량이 높은 글입니다. 주의해주세요.
*교살, 그 외 폭력적 상황의 직간접적 언급이 다수 존재합니다.

BGM : youtu.be/2VFgF1ynCbI


"또 시작이네."
"엄밀히 말하면 생각이 바뀐 적 없으니까 '또'도 아니고 '시작'도 아니지."

"예, 예. 참 잘나셨어요."

각별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스크림 꼭지를 입에 물었다. 거슬한 가장자리에 입술이 살짝 베였는지 소다의 인공적인 맛 뒤로 비릿한 쇠맛이 스며들었다. 뜨거운 공기와 대조되는 한기에 아이스크림을 쥔 손이 얼얼했다. 공룡은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물다가, 뭔가 어긋났는지 인상을 팍 썼다. 으, 이 시려. 그러게 이 좀 잘 닦으랬지. 하는 시덥잖은 대화가 오갔다. 긴 머리칼이 덮은 뒷목에 불쾌한 열기가 돌아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끝이 펄럭이며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공룡은 눈앞에서 나풀대는 저 머리끈을 붙잡아 당겨버리면 각별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다. 정확하게는 알고 있는 반응을 눈앞에서 보고 싶었다. 공룡이 머리끈으로 손을 뻗는 순간 귀신 같이 돌아보았다. 공룡은 급하게 손을 내렸다.

 

"이번엔 왜 또 그러냐고 안 물어봐?"

"내가 그걸 몇번을 물어봤는데 제대로 대답 안 해줬잖아요. 그래서 안 물어보려고."
"난 꼬박꼬박 대답 해줬는데."

살 이유가 없어서. 웃기고 있네. 그런 이유라면 댁이 꾸역꾸역 안 죽는 이유도 아주 쉽게 말할 수 있다. 죽을 이유가 없어서.

처음 만난 계절은 가을이었다. 여름방학은 끝났으나 여름의 꼬리가 남아 질척이던 더운 가을날. 더운 바람이 들어오던 옥상 문틈은 반년차 고등학생의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충분했고 그 안에 있던 건 환상과는 좀 동떨어진 지독한 얼룩이었다. 그 노란 눈동자는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여상하게도 웃으며 너도 죽으려고 왔냐고 물어봤다. 초면에. 파란 하늘을 등지고 검은 긴 머리칼이 흩날렸다. 미쳤네. 환상은 개뿔. 스릴러물의 오프닝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난간 위에 짚어진 가는 손가락 하며 하는 말 하며. 공룡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옥상 문 뒤로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 있다가 분명 경찰서에서 증언이나 하게 생겼다. 죽은 학생과 아는 사이였나요? 아뇨. 그 날 처음 봤는데요….

"
농담이야. 돌아와. 내가 아무리 그래도 누가 보는 앞에서 죽겠니."

이름이 뭐야? 공룡이요. 각별. 고등학교 2학년. 1살 차이인데 몇 년은 더 차이 나보이는 인상이었다. 노안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풍겨오는 느낌이 그랬다. 일찍 세상에 내던져져서 이리저리 치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게 사람을 끌어들였다. 괜히 그 옆에 자리를 펴고 앉게 만들었다. 각별은 허구한 날 죽음을 입에 담았다. 처음엔 생긴 것도 비리비리한 게 지병이라도 있나 했더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딱히 괴롭힘 같은 걸 당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정확하게는 그럴 사람도 아니었고. 그냥 죽음이 버릇이었다. 그런 말을 해야만 세상이 살아있다고 인정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공룡은 초반엔 저 형이 언젠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이 올까봐 매일 2학년 교실에 올라갔지만, 반 년 쯤 그런 목적 없는 갈구가 계속되자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지. 중학교 2학년 쯤 졸업하는 그 때. 공룡은 각별이 그런 시기를 좀 많이 오래 겪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각별의 눈동자 밑바닥에 일렁이는 검은 아지랑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굳이 이해할 필요도 의무도 없었지만, 공룡은 그에게 꽤 호의적이고 싶어했다. 스스로 세상의 호의를 내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인가. 어쩌면 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감정을 가지게 해서 지독하게 묶어두는 것이 각별이 살아가는 방식인지도 몰랐다. 여튼, 공룡은 그걸 간파했으니 끝까지 묶여있지는 않을 거라는 착각에 사로잡혀서 그 곁을 지켰다.

그 이후로도 또 반 년, 각별이 말하는 생의 마지막, '성인'까지 반 년
정도 남은 여름. 각별은 또 다시 성인이 되기 전에 죽겠다고 말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스팔트를 부어오른 발로 밟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 어른이 되기 전에 죽겠다는 거예요?"
"그러고싶으니까."

"물어본 내가 멍청이지."

공룡의 이 끝에 딱딱한 막대가 닿았다. 각별이 입에 물고 있던 튜브도 어느새 쪼그라져 형체를 잃었다. 아이스크림이 더 나오지도 않는 튜브를 입술 끝이 붉게 부어오를 때까지 잡아물고 있는 꼴이 퍽 우스웠다. 삶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굴면서 저런 사소한 것들에 질척거린다. 그런 인간이었다. 공룡은 혀 끝으로 막대를 깔딱거리다가 퉤 뱉어버렸다.
막대기가 아지랑이를 흩어냈다. 반 년. 공룡은 각별이 죽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때맞춰 죽을 용기가 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사람이다. 그냥 그 반 년이 지난 뒤의 각별이 궁금했다. 다음 목표를 세울지, 아니면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아갈지.

*

수능을 앞둔 한낱 고등학생에게 그딴 능력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이런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수도 없는 게 사람 심리였다.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을 거야. 아, 그러시면 혼자만 죽을 것이지. 손가락 끝에 말라붙은 피딱지를 벗겨내다 무언가 잘못 건드렸는지 통증이 방울져 새어나왔다. 인간 아닌 것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목소리라고 불러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울음소리라고 하기에는 주체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라고 해버리면, 손에 눌러붙은 붉은 얼룩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진다. 공룡은 없는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다 차라리 무게를 견뎌내는 쪽을 선택했다. 인간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마지막 양심의 무게였다. 주먹을 쥐었다. 손톱 끝에 버석거리던 가루가 떨어졌다. 입김을 불자 비릿한 냄새가 나는 작은 구름이 만들어졌다. 왜 벌써 춥지. 수능이 이맘때던가. 그러면 그럴만 하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나. 공룡은 손바닥을 마주 대고 문지르며 교실 문을 조심히 열었다. 규격이 맞지 않아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거슬렸다.

 

"나 왔어요. 다친 곳은 좀 어때?"

 

각별은 답하지 않았다. 대충 옷으로 싸매둔 환부에서 불쾌한 냄새가 났다. 얼굴이 창백했지만 입에서 작은 연기가 새어나오는 걸 보아하니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었다. 공룡은 가져온 상품들을 때 탄 마룻바닥에 쫙 늘어놓았다. 흔히 비상식량 하면 생각나는 몇몇 것들. 사람들이 차마 물건들을 사가기도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에 남은 것들은 많았다. 공룡은 책상 서랍 틈에 끼어있던 사인펜으로 포장지에 글자를 끼적거렸다. 각별 몫을 챙겨야할까 고민하다가 괄호를 쳤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 날에 일은 터졌다. 평안에 젖은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버렸고 공룡은 멋모르고 휘둘리다 학교로 돌아왔다. 그 곳에 우연찮게도 각별이 있었다. 상처투성이로 눈만 겨우 치켜뜬 각별이 있었다. 늘 그 놈의 알량한 자존심만큼 높게 묶고 있던 머리칼은 다 헝클어져 목덜미 근처에 엉켜있었다. 항상 성인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다더니, 왜 아득바득 살려고 학교로 들어왔어? 물어볼 가치도 없는 의문이었다. 각별은 사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이었지, 죽는 데에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생채기 하나에도 밴드를 덕지덕지 붙여대던 게 각별이었다. 어차피 죽을거라면서 그냥 냅뒀다 파상풍으로 확 죽어버리지 그래요. 하고 살벌한 농담을 던졌던 게 기억이 났다.

둘은 사람이 더 이상 들어올 일 없는 교실에 자리를 잡았다. 책상들로 대충 창문을 가리고 사물함에 처박혀있던 담요들을 깔았다. 가끔씩 급식실이나 매점을 찾아가 먹을 것을 구해왔다. 구조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밖에서 객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공룡은 불현듯 각별이 죽음을 갈구할까봐 늘 긴장해야했다. 같이 있다고 도움이 되는 일은 없었지만 혼자 있긴 싫었다. 하지만 각별은 단 한 번도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직면하니 두려워졌던가. 하지만 그는 직면하길 즐기는 사람이었다. 옥상 난간 위에 발을 붙이고 서 있거나, 차선 경계석 위에서 상체를 기울여대는 통에 공룡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룡은 각별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모르나, 입을 열지 않는 것엔 감사했다.
그냥 모른 척 하고 살았으면 했다. 이미 반쯤 죽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여기서 진짜 죽어버리겠다고? 그건 안될 말이지. 공룡은 억지로 과자를 쥐여주었다. 각별은 꾸역꾸역 씹어삼켰다. 살려고 노력한다고 착각할 만큼.

사고는 허무하게 일어났다. 생존의 다급함보다 우선된 무료함에 지쳐 창고를 뒤적거리던 중 자재들이 무너져내렸다. 먼지폭풍이 한 차례 시야를 덮고 소리를 들은 인간들이 미친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그 사이에서 각별을 불렀다. 비릿한 냄새가 나서 알긴 쉬웠다. 가는 팔목을 붙잡아 당기자 비명을 질렀다. 이를 세워대는 끔찍한 것들 사이로 팔을 뻗어 문을 제꼈다. 유리문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쾅쾅거렸다. 다시 교실로 돌아온 과정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놓지 않으려고 미친듯이 붙잡았던 팔목에 점점 힘이 빠졌던 것만 기억 났다. 교실 문을 닫자마자 각별이 그대로 마룻바닥에 쓰러졌던 것도.

사고 이후로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각별은 금방 죽을 것 같은 몰골로 잘도 살아있었다. 환부가 계절을 타 곪았다. 공룡은 각별이 이런 상황을 알고서 매일 그런 소릴 한 건가 의문이 들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성인이 되기 전에 죽게 될 거라는 소리였나. 헛웃음을 뱉었다. 각별은 처음에야 신음소리라도 냈지, 이제는 가냘픈 숨소리 외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다. 공룡은 잠을 자고 일어나면 각별의 코 밑에 손을 대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비가 내렸다. 드러난 철골과 말라붙은 핏자국에서부터 철분의 냄새가 비를 타고 공기를 메웠다. 눈이나 내릴 것이지. 늦가을의 비는 차가웠다. 각별의 몸은 더 차가웠다. 고비라면 고비였다. 공룡도 더 이상 각별을 책임질 여력이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야했다. 각별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공룡은 각별 앞에 섰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목 깊은 곳에서 울음이 샜다. 버리고 가면 이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버리고 가야만 한다. 그걸 각별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각별이 할 말이 궁금했다. 원하던 대로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지, 아니면 답지않게 살려달라고 애원할지. 죽여달라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살려달라고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룡은 어떤 말도 견뎌낼 기운이 없었다. 각별은 흐릿한 숨을 내쉬다가,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떠 공룡을 바라보았다. 노란 눈동자에 아지랑이가 없다. 바싹 마른 입술이 말을 하려는 듯 경련했다. 몇 주 만에 처음으로. 룡아, 공…룡아. 오랜만에 들어본 타인의 목소리는 심장을 쥐어짜기 충분했다. 응, 듣고 있어. 눈동자가 흔들렸다. 각별은 입술을 깨물고,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나, 죽ㄱ-

말은 공기가 새는 소리에 가려 묻혔다. 감싼 손에 힘줄이 돋았다. 몸이 경련하다가 그대로 맥없이 풀어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목과 똑같이 멍이 든 손바닥이 바닥에 강하게 내리꽂혀 아팠다. 실없이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샜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목구멍이 막혀버렸다. 공룡은 교실 문을 붙잡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규격이 맞지 않는 문이 몇번이고 덜컹거리다가 부서지는 것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열렸다. 숨이 막혔다. 제 목에도 똑같이 멍이 들어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어떤 말이 들리든 간에 공룡은 후회하게 되었을 거다. 평생 그 사람의 마지막 말과 노란 눈동자가 심장 속에 틀어박혀 잊을만하면 속을 찔러댔을 거다. 그러니까, 공룡은, 각별에게서 자유로워졌다. 마지막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빗소리가 지웠다.

*

"얼마 안 남았네요."
"그러게. 시간이 참 빠르지."
"어떻게 죽을 생각인데요?"
"나도 몰라."

각별은 덤덤하게 중얼거리면서 난간에 등을 기댔다. 비행기 하나가 때마침 구름 한 줄기를 남겼다.
내 앞에서 죽을 생각은 아니죠?

"적어도 네 앞에서는 숨 잘 쉬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

 

이파리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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