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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유토피아] 미련

모두들 살고 싶어한다


3개월. 어쩌면 조금 더. 난데없이 벼락이 떨어졌다. 그렇게 행복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마무리 지어질 만큼 가치 없는 삶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이 속절없이 바닥 그 이하 깊은 곳으로 추락했다. 신이 정말 계신다면 나한테 이럴리가. 굳게 믿어왔던 신념이 조각나 발바닥에 큰 흉터를 남겼다. 앞으로 걸어나가는 게 이토록 두려운 일이었던가. 멈출래도 멈출 수가 없다. 발을 움직이지 않으니 조각이 발 속으로 파고들고 움직이자니 딛는 모든 곳이 핏물이다. 선택지가 많지 않으니 일단 웃으며 걷는 쪽을 택한다. 신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을 원망하는 쪽을 택했다.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게 분명하다.


"제가 직접 죽여야합니까?"

 

생명을 원하는 자 생명을 바쳐라. 익숙한 문구가 입에서 흘러나오며 칼을 건넸다. 눈 앞에 죽은 듯이 자고 있는 형체는 재단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민아진이라는 여자가 분명했다. 아무렇지 않게 죽이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재단의 평안을 해치고 손톱의 거스러미처럼 쉴새없이 깔짝대던 여자. 생명을 원하는 자, 생명을 바쳐라. 입 속에서 소리가 쉴새없이 맴돈다. 살고 싶다는 욕망 위를 얄팍한 양심이 덮고 있었다. 심장이 뛰다 못해 막 속에서 터졌다. 동시에 덮고 있던 얄팍한 인간성도 터져버렸다. 아니지, 어쩌면 이게 가장 인간적인 선택이 아닌가? 모든 이들은 살고 싶어한다. 무슨 짓을 하든 어떤 이유를 붙이든 살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인간성을 버렸다기보다는 도로 주워온 것이나 다름 없다고 봐야지.

새로 벌어들인 시간은 따뜻했다. 동맥이 새로 스며든 피를 어떻게든 심장으로 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루라도 더 살아보겠다고,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바 붙이고 서 있어보겠다고. 둥, 둥 북소리가 났다. 영생의 낙원에 한 발자국 다가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차장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서류를 건네던 각별 과장이 말을 걸었다. 어, 아니야. 요즘 밤을 좀 샜더니 피곤했나보네. 받아든 서류 밑바닥에 익숙한 두께의 USB가 만져졌다. 각별은 몸 관리 잘 하십쇼. 하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새로운 사원들이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룡 부장은 영업부 일부에게 비밀스러운 지시를 내렸다. 주제에 정의의 사도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건지. 무릉패션이 도원재단과 유착관계라고 단언하며 증거를 모을 것을 지시했다. 그 틈에 도원재단 사람이 섞여있는 줄도 모르면서 뭘, 다 간파하고 위험을 무릅쓰는 영웅 노릇을 하겠다는 건지. 공룡 부장은 그 위에 앉아있으면서 내부를 먼저 살펴야한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사람을 너무 믿는 그 성정 탓이다. 그 왜곡되었지만 중심만은 바른, 이상한 성정에 현혹되어 똑같이 영웅 놀이를 하고 있는 잠뜰 사원이며 덕개 인턴은 무슨 죄인가. 각별 과장이야 매일 될대로 사는 사람이고, 라더 대리는 본인이 더 열정적으로 임하는 것처럼 보이니 차치하고.

USB 속에는 입출금 내역이 엑셀파일로 빼곡히 정리되어있었다. 이런 걸 어떻게 찾은 거야. 각별 과장의 정보력에는 박수를 보냈다. 그걸 공룡 부장에게 바로 전달하지 않은 조심성에도 찬사를 보내나, 그 방향이 틀린 것은 안타깝다.
백스페이스 몇 번에 쉽게 지워지는 자료다. 각별 과장의 성격 상 백업이야 해놨겠지. 하지만 뭐라 말하지 않으면 그들은 서로가 가진 자료에 치명적인 공백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테다. 조심성은 가끔 큰 오점을 남긴다. 돌다리를 두드리는 건 좋지만, 건너온 돌다리가 두드린 탓에 부서지진 않았는가 확인은 했어야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나온 길은 신경쓰지 않는다. 돌아가야 할 상황 자체를 생각해두지 않으니까. 물론 이 생각을 하며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셀 숫자를 고치는 본인도 포함이다. 속 깊은 곳에서,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통증이 일었다. 망할, 언제까지 이렇게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을 팔자에도 없는 스파이 노릇을 하며 보내야하는가. 키보드를 누르던 손끝이 멈췄다.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리 끝을 채우기 시작했다. 시작이 어렵지, 반복은 쉽다. 재단 측에서도 이 용감하신 내부고발자들을 처리해준다고 하면 흔쾌히 승낙하실테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부장님. 이번 분기 예산서요."
"아, 고맙네. 수현 차장. 이런 저런 일 다 맡으니까 힘들지."
"뭘요. 다 회사를 위한 일인데."

파일철 밑에는 USB가 껴 있다. 그 점을 손끝으로 슬쩍 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룡 부장은 착한 사람이다. 사람을 믿는, 너무 착한 사람. 공룡 부장의 시선이 잘 정리된 표를 훑어내리다가 입점 예정란에 가닿았다. 쇼핑몰 유토피아. 공룡 부장의 성격 상 입점 직전에 확인을 해야만 했다. 등 뒤로 숨긴 손끝에 땀이 맺혔다.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신에 대한 역겨움 때문도 아니었고, 혹시나 수작을 부린 것이 들킬까 겁이 난 것도 아니었다. 쾌감에 가까웠다. 욕망을 붙잡아 삼키기 직전의 쾌감. 심장을 꿰뚫는 순간 손끝까지 전해졌던 쾌감. 공룡 부장의 입에서
견학 날짜를 조율하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다시 심장이 쿵 뛰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이렇게 큰 기대감을 주는 일인지는 미처 몰랐다. 몰랐어야했다. 그러나 알아버린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들의 희생은 분명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모르겠지만, 도원재단에는, 그로써 새 낙원에 발을 딛을 자신에게는 분명히.

*

망했다.
망했구나. 목에서 아릿한 통증이 퍼졌다. 막혀있던 숨이 터졌는데 들어오는 건 물이었다. 아, 망할. 속 깊은 곳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죽음 근처에 서 있던 적에 느껴지던 통증이었다. 고개를 겨우 들자 물 밖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붉은 형체가 보였다. 몸을 움직여 헤엄을 치라면 칠 수 있었다. 그러라면 그럴 수 있었지만 그 다음은? 하지만 새 삶이 코앞이었는데. 이대로 죽어버리면 손끝에 묻고 혈관을 적시던 수많은 피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기어코 주워들었던 인간성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붉은 형체가 자잘한 스파크가 튀는 검은 줄을 길게 뺐다. 아진아. 중얼거리는 소리가 확실히 들렸다. 아, 끝까지. 아진아.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눈 앞이 깜깜해졌다.

수현은 제 손에 묻힌 피가 그대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제 입에서 나오는 게 제 비명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여러 명의 비명이 한꺼번에 섞여나왔다.

낙원 문턱에 발끝이라도 닿았는가? 그 문을 열기도 전에 추락해 알 수 없었다. 수현은 처음으로 신을 원망했다. 나를 위해 더 많은 생명이 필요하셨다면 말씀하시지.
수현은 제 몸이 떨리는 것이 단순히 차가운 물 때문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죄책감을 품지 않은 자신을 바라보는 양심의 잔해 때문일 거라고. 끝에서야 겨우 고개를 내민 인간이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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