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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혁명] 심해

BGM : youtu.be/L9vLOGoMrOs

얕은 파도에 쓸려간 모든 이들에게

 

"라더야."

 

목소리가 어른거린다. 귓속이 물로 꽉 차서 잘 들리지 않았다. 입을 벌리니 내장을 채우고 남은 물들이 벌컥거리며 튀어나왔다. 외부와 오랜 시간 단절되어 약해진 피부는 바닷물의 소금기에 금방 고통을 호소했다. 수압에 눌린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으나 물이 눈 속에도 들어찼는지 세상이 일렁이다 흘러내리길 반복했다. 속절없이 몸을 기댄 금색 바윗덩이가 손발을 묶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벅찼다. 온 세상이 물에 잠겼다. 온통 푸르른 눈 앞에 네가 똑바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차가운 수중에 네 손만 따뜻했다. 

 

언젠가 인간의 오만에 분노한 신이 세상을 물로 쓸어버렸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선택받은 이들은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았고 신의 분노를 산 이들은 그대로 물속에 수장되었다. 파도가 쳐 몸이 떠올라 흘러갔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다리는 수압에 짓눌려 밑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꽤 깊은 곳에서 불어온 파도인가. 몸에 닿은 물결이 따뜻했다. 바닷속에도 비가 오나보다. 찬 뺨에 계속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두운 시야 끝에 살짝 빛이 들어오자 미처 떠오르지 못하고 가라앉은 형체들이 눈에 띄었다. 검붉은 그림자를 흘리며 물 밑바닥에 깊게 가라앉은 이들이 눈에 띄었다. 손을 뻗으려 했으나 뻗어지지 않았다. 강한 물살은 몸을 얽매고 눈을 감겼다. 빛이 사라지는 찰나에 웃고 있던 누군가를 본 것도 같다. 얼굴의 절반이 그림자로 덮였는데도 웃고 있는 게 신기했다. 근위대장, 덕개. … 덕개야. 중얼거리는 목 끝이 비리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던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던가. 둘 다였던가. 목구멍을 채운 물이 허락하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메아리가 제 이름을 부른 것도 같다.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대답을 해줘야하는데. 떠오르는 태양빛이 몸을 기분 좋게 데울 무렵 물결이 멈췄다. 뚝뚝 비가 온다. 누가 이미 물로 가득 찬 세상에 또 물을 뿌리는 걸까. 바다가 넘쳐 육지를 가득 채우고 기어코 모든 것들을 잠기게 하길 바라는 자는 누구인가. 기억하기에 그런 사람들은 이미 물속에 가라앉았다. 파도를 억지로 막으며 모래를 쌓아 올린 대신도, 밀려오는 물살을 기다리지 못하고 뛰어들었던 시민도, 그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던 자신도. 가라앉은 왕국 위엔 흙이 덮이고 새 육지를 찾은 선택받은 자들은 잔해를 보며 이후의 오만을 경계하겠지. 웃고 싶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언젠가처럼 고개를 젖히고 신나게 웃고 싶었으나 짓누르는 물살이 허락하지 않았다. 잠뜰아. 우리 다음에는 친구로 만나자. 파도가 덮쳐와도 손을 놓지 않을 친구가 되어 만나자.

 

*

 

잠뜰은 모래사장에 서 있었다. 어릴 적 라더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몸이 나으면 바다에 가보고 싶어. 지금도 가자고 하면 갈 수 있어. 아냐, 덕개가 걱정할 거야. 이미 너무 미안한 일들이 많아서…. 잠뜰은 허리춤을 적시는 파도에 눈을 감았다. 손을 놓자 넘실거리더니 슬슬 가라앉았다. 라더야. 듣지 못할 이름을 불러보았다. 라더야. 주인 잃은 이름을 불렀다. 라더는 물살에 휩쓸리더니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울었는데도 더 나올 눈물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린 우리들이 견디기에는 너무 벅찬 파도였다. 눈을 감았다 뜨니 순식간에 휩쓸려버렸다. 숨을 참고 몸을 담궜다. 새파란 물결 사이 더 새파란 네가 일렁거렸다. 손을 뻗었다가 그만두었다. 너를 붙잡아서는 안되는 걸 안다. 소금기 때문에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멀어지는 너를 바라만 보다가 몸을 세웠다. 저 바다에서는 물고기가 되어라. 기왕이면 한 마리 상어 같은 게 되면 더더욱 좋겠다. 물살이 함부로 쓸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큰 상어가 되었으면 좋겠다. 허망한 수평선에 노을이 녹는다.

 

파도는 순식간에 세상을 집어삼켰다가 죽어버린 이들을 안고 도로 밀려들어갔다. 남은 자리엔 승기와 폐허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폭군도 영웅도 남지 않았다. 잔해만 남아서 흙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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