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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이방인] 상징

"신화가 되어주십시오."


각별은 선한 사람이었다. 책임감 또한 과학자로서의 윤리의식 그 이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세상을 한 번 망하게 한 장본인으로서, 각별은 운 좋게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준 이 작은 곳에 어떤 부채감마저 갖고 있었다. 각별은 희망이라는 빚을 갚기 위해, 과학자로서의 책임감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화려하게 장식된 머리장식을 썼다. 생각보다 무거워 고개가 푹 꺼졌다. 태양선인. 세상을 한번 망하게 만든 사람에게 붙여지는 칭호 치고는 화려한 이름이었다.
꺼져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명이 사라진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떠있었다. 눈이 아렸다. 이제 기존에 존재하던 세상은, 삶은 없었다.

"태양선인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지금이 몇 대인지도 기억 나지 않는 태음신관이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폐하께도 걱정 말라고 전하세요. 노기에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침착하게 억눌렀으나 가라앉히긴 힘들었다. 애꿎은 손바닥에 짙게 패인 자국이 남았다. 문 밖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열이 빠진 머리가 핑 돌았다. 아무렇게나 길러둔 머리칼이 시야를 덮고 연구원 가운보다 더 거추장스러운 옷가지가 바닥에 널브러진 기물들을 싸고돌았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장식은 쓸데없이 단단해 금도 가지 않았다. 또 다시 노기가 치밀어 옷자락을 꾹 쥐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난리 통에 해독제가 든 병이 깨지지 않았나 확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각별은 대체로 수십, 수백년을 살아온 신화라는 명맥에 맞는 태도를 유지했으나 간혹 지독하게 어긋나버릴 때가 있었다. 저 하늘의 별들이 하나 둘 떨어질 때마다, 본인의 존재가 그저 허구의 신화로 치부되는 것을 느낄 때마다, 빌어먹게도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난동을 부렸다. 흰 옷가지에 얼룩이 질 때까지 방 안을 뒤엎기도 하고, 애꿎은 태음신관을 불러 갈 곳 없는 화를 표출하기도 하고, 그저 텅 빈 방 한 가운데에 주저앉아 죽은 사람처럼 눈물만 뚝뚝 흘리기도 했다. 자신이 드디어 미쳤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마냥 기뻤다. 나는 사람이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해독제로 손을 뻗었다가, 입에 갖다대기 직전에 멈추었다. 망할 책임감이
었다. 총리님,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셨습니다. 너무 무거워서, 이 지구조차 감당하지 못할 게 뻔해 내려둘 수도 없는 무거운 짐을 말입니다. 각별은 죽어버린 자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일어났다. 문명은 급속도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전의 것들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언젠가 제재가 필요하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태양선인의 이름은 여전히 존재해야만 했다. 각별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머리칼을 정리해 묶었다. 무거운 머리장식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수백년이 더 지났다.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몇 대는 더 거쳐 바뀐 태음신관은 늘 옆에 있었다. 성주는 선한 사람이었다. 성군들은 제 위치를 잘 지키고 있었다. 태양선인이 해야하는 일은 그저 성주가 도움을 요청할 때 두어 마디의 조언을 해주는 일 뿐이었다. 성주의 고민은 언제나 같았기에 힘들 것도 없었다. 새로 부임한 성군 라더는 자주 태양선인의 거처에 드나들었다. 성군께서는 언제나 활기가 넘치십니다. 농담처럼 중얼거리는 말 틈에는 같은 처지의 사람을 향한 연민과 애정이 담겼다. 라더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태양선인은 라더의 존재에 만족했다. 그저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존재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에 감사했다. 동시에 죽을 수 없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 서글펐다. 홀로 영생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기에, 다른 사람 역시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각별은 불현듯, 자신이 모든 선택의 초점을 과거에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가 겪게 하지 않기 위해서. 각별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태양선인. 과거의 잘못을 안고 영원히 그 곳에 존재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누구 하나 알아채지 못할, 과거의 잔재.
각별은 더 이상 해독제를 집어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두고 상징이 더 이상 필요없어질 때를 기다렸다. 평화의 상징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당연하게 평화가 존재하는 그런 때가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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