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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겨울신화] 상념

눈이 녹는다.

회색 눈구름이 흩어지고 태양이 솟았다. 몸에 덮여있던 눈들이 먼저 녹아가는지 옷가지가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체온이 없으니 눈이 녹을 이유가 없을텐데,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던 찰나 옷가지를 적시는 것이 비단 눈이 녹은 물 뿐은 아님을 깨달았다.
손끝에 까슬거리는 잔디가 닿았다. 눈에 오랜 시간 덮여있었음에도 끈덕지게 뿌리를 뻗어나가던 잔디가 닿았다.

신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어버린 신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알지 못했다. 언젠가 신은 죽지 않고 영원히 순환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어딘가의 신화에는 신을 죽인 인간의 이야기가 쓰여있었던 것도 같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랜 옛날, 신으로 눈을 뜬 순간부터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궁금증을 이렇게 풀게 되는구나. 겨울신은 녹아가는 입꼬리를 비틀어올렸다.
웃음이 나는가 싶더니 흘러내리는 물방울과 함께 지워졌다. 흘러내리는 시야 끝에 노란 꽃봉오리가 들어왔다. 언젠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들이 책을 보며 복수초라는 꽃에 대해 이야기해준 기억이 났다. 봄을 맞으려 쌓인 눈을 녹여가며 피어나는 샛노란 꽃. 이 꽃이 복수초라면, 3년만에 돌아온 봄에 들떴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겨우 들어 사랑스러울 정도로 작은 꽃 주변의 눈을 쓸어냈다. 눈이 녹으며 자리에 깊은 물웅덩이를 만들어버리면, 꽃이 차마 버티지 못하고 익사해버릴까봐. 눈을 적당히 걷어내자 손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속절없이 녹아 바닥을 적실 뿐.

겨울신은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들이 적당히 하늘을 가려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좋게 만드는, 봄의 하늘. 몸에 박혔던 화살은 어느새 몸 맡길 곳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눈은 이제 일부만 남아있었다. 봄의 땅은 간만에 해소되는 갈증을 반겼다. 어딘가 겨울잠에서 깨어난 동물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겨울신은 눈을 감았다.

정말 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면, 한번만 더 이 세상을 사랑해보려고 했어도 괜찮았을 거다.
겨울신은 사라지는 시야 속 세상이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도 추악하다 느끼던 세상이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도로 색을 찾은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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