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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포스트 아포칼립스] 목적지

* 전체적으로 우울감의 밀도가 높은 글입니다.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BGM : youtu.be/oakL_SppwP8

 

세상은 멸망했다. 어떤 징조도 없이 순식간에 멸망했다. 아니지, 생각해보면 전조는 있었다. 지속되는 환경오염, 뉴스에서 입 아프게 떠들어대던 바다 건너의 전쟁, 어딘가에서 퍼지고 있던 전염병. 눈치채지 못했거나 눈치챘음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지 멸망은 차근차근히 그리고 확실하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정확한 사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깜빡였더니 평온한 일상 속에서 공허한 폐허로 옮겨졌다. 무너진 건물 잔해와 밑에 깔린 주인 모를 신체부위들을 보며 쉴 새 없이 구역질을 했던 게 기억났다. 움직였던가, 반복된 구역질 탓에 시야가 어그러져 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본인이 유리되어있다고 느꼈던 활기찬 도시가 이렇게 한 순간에 사라지고 나서야 그 안에 있을 적이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역시 인간은 간사하다. 각별은 머리끈을 입에 물고 만신창이로 흩날리던 머리칼을 높게 올려 묶었다. 폐허의 철가루를 실은 바람이 드러난 뒷목으로 적나라하게 와닿아 소름이 돋았다. 어딘가에서 주웠던 낡은 가방을 다시 고쳐 매고 걸었다. 그 자리에 멈춰있다가 알아서 굶어 죽거나 미처 떨어지지 못했던 잔해에 맞아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인간은 간사하다. 

 

천장에 뚫린 구멍 사이에 느릿하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가 오려나. 쓸데없이 청명한 하늘 끝자락부터 흰 구름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비는 아닌가 보네. 공룡은 팔다리를 쫙 폈다. 몸을 뉘인 벽은 한 명 눕기에 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하지도 않았다. 각별이 이불 같은 걸 가져왔으려나 잠시 기대했지만 금방 접었다. 각별이 들고 간 가방이 이불을 넣을 정도로 큰 것도 아니었고, 원래도 그랬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후로 더 합리성을 추구하게 된 그의 특성상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이불은 식량 등과 비교해 충분한 우위를 점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가방에 안 들어가는 이불을 꾸역꾸역 이고 들어올 정도로 살아갈 의지가 충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에 몸이 배긴다느니, 허리가 쑤신다느니 하면서 불평할 사람은 본인뿐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아직 마르지 않은 수도에 고개를 박고 목을 축이거나, 본인이 누운 자리에 불평할 수 있는 입이 없었다. 태평한 사람은 다 죽었겠지. 공룡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벽을 손으로 받쳐 점검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런 와중에도 하품은 나온다.

 

"왜 나왔어."

 

때마침 각별이 돌아왔다. 한쪽 어깨에 덜렁덜렁 매고 있는 배낭 꼴을 보니 허탕이다. 뭔가 많이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하지 않았거나. 공룡은 배낭을 보다가, 각별을 바라보고 예의 웃음을 지었다.

 

"각별님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지. 들어가자."

"어련히 알아서 오려고…."

 

이제 건물도 거의 없어서 길 잃을 염려도 없는데. 각별은 덤덤히 대꾸하며 벽 안으로 들어갔다. 공룡은 각별의 배낭을 넘겨받고는 느껴지는 가벼운 무게에 허탈하게 웃었다. 저 사람은 살 마음이 없다. 원래도 그런 느낌이 없던 건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후로는 관성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공룡은 처음 각별과 만났던 때를 기억했다. 높게 올려묶었던 머리칼은 다 만신창이로 흩어지고 어딘가에 들이받혔는지 손끝에서 검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공룡의 꼴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각별의 꼴을 보니 자신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별은 공룡의 얼굴을 보자마자 텅 빈 노란 눈동자로 그렇게 말했다. 왜 하필 너밖에 안 남았냐.

 

"각별님. 지금 며칠이지?"

"마지막으로 물 마신지 일주일은 된 거 같은데 안 죽었으니까 그 날 이후로 3일 이내."

"대충 일주일?"

"그렇겠지."

 

각별은 판판한 잔해에 몸을 뉘였다. 고작 일주일이구나. 공룡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늘어둔 물 페트병 하나를 각별 쪽으로 내던졌다. 안 마신지 일주일이나 된 거 같으면 마셔, 좀. 각별은 마지못해 목을 축였다. 인간은 간사하다. 살아나갈 용기는 없는데 죽을 용기도 없다. 차라리 굶어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주제에 목이 말라붙는 느낌은 끔찍하다. 이 끝으로 입술을 짓눌렀다. 탁 터지는 아릿한 통증과 함께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공룡은 벽에 기대어 앉아 각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은데, 저 사람은 죽고 싶어한다. 정확하게는 살고 싶지 않아한다. 나는 살고 싶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냥 혼자 있기 싫은 거지. 혼자가 되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건 무서우니까.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숨줄을 억지로 틀어쥐고 이어붙여가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멍청한 겁쟁이들이다. 이런 상황에 살아남는 사람의 유형은 오로지 그 뿐이다. 멍청하고 미련한 겁쟁이들.

 

"공룡."

 

어느 날 각별이 공룡을 불렀다. 각별이 먼저 침묵을 깬 건 간만이었다. 공룡은 이 변화를 좋아해야할지 싫어해야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우울증 환자들이 늘 그렇다지. 갑자기 밝아진다거나, 사람이 바뀐다거나. 매번 누워있는 사람의 입에서 대답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건 환영이지만, 그 대가가 부재라면 사양이었다. 왜, 각별님.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어떤 말이 튀어나와도 울고 싶어지겠지. 각별의 텅 빈 눈 끝에 작게 푸른 빛이 돌았다. 말라붙은 입술이 열렸다.

 

"우리 바다나 갈까?"

 

*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신발 밑창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길가에서 그나마 멀쩡한, 주인 잃은 신발을 주워다 갈아신어야했다. 가방 속에 담아온 것들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아 어깨가 아프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주워신은 신발 밑창이 다 떨어질 때쯤 발끝에 고운 모래가 닿았다. 눈가가 아릿하게 아픈 것은 분명 바닷바람의 소금기 때문이었다. 공룡은 눈을 비비며 포말이 바스라지는 물가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 숨이 터져나왔다. 각별은 그 옆에 서서 수평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가 뜨고 있었다. 수평선 끝에서부터 해가 녹은 자국이 파도를 타고 쓸려내려왔다. 손끝에 닿는 모래알갱이들이 간질간질한게 기분이 좋았다. 

 

"온 보람이 있네. 엄청 예쁘다. 그치, 각별님?"

 

각별은 말이 없었다. 그저 태양에 홀린듯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바다 밑에서부터 새파란 색깔이 어른거렸다. 침묵 사이에 파도소리만 요란했다. 각별은 천천히 파도 끝에 발을 담궜다. 오랜 시간 걸어 붉게 부어오르고 염증이 터진 발이 소금기 어린 물에 닿아 아팠다. 공룡은 각별이 어느 순간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갈까봐 무서웠다. 그저 걷는 꼴을 보았다. 물이 발목을 삼킬 쯤 되자 입을 열었다. 각별님. 답이 없었다. 각별님. 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각별님. 일어나야했다. 일어나서 붙잡아야했다.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이게 낫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섭다. 공룡은 다시 한 번 입을 열고 숨을 들이마셨다. 각-

 

"…너무하네."

 

각별은 중얼거리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닷물이 몸의 반을 집어삼켰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파도 사이에 원형 파동이 일렁였다. 각별은 고개를 치켜들고 태양을 향해 저주하듯 외쳤다. 

 

"이렇게 아름다우면 죽을 수가 없잖아."

 

공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파도 소리 사이에 섞인 메아리를 들으며 가만 앉아있었다. 태양빛이 시야를 가렸다. 각별이 버릇처럼 중얼거렸던 말이 있다. 인간은 간사하다.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일출을 보고 살고 싶다고 아우성 칠 만큼 간사하다. 죽음으로 걸어가면서도 살고 싶다고 발버둥 칠 만큼, 더럽게 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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