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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조직물] 하극상

아 심심한데 윗대가리 목이나 딸까

BGM : https://youtu.be/78IaxWzDkuU


공룡은 진지하지 못하다. 조직 내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 총을 쥐여준다는 건 안전핀 뽑은 수류탄을 바닥에 굴리는 행위나 진배없었고 그를 혼자 거래 현장에 나가게 한다는 건 적어도 신입 둘 정도의 목숨은 담보로 내놓는 셈이었다. 말단 조직원들은 저런 설렁설렁한 태도 안에 큰 힘이 숨겨져 있을 거라면서 수군댔고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조직원들은 저 속은 텅 빈 주제에 어깨에 힘이나 주고 다니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릴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동기 라더는 늘 비교대상이었다. 과묵하고, 능력 있고, 보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제 손가락 두어 개 정도는 가볍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라더가 공룡과 친밀한 관계라는 건 조직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슈거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조직에 들어와 비슷한 시기에 보스 바로 밑자리까지 올랐으나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은 곧잘 신호등에 비유되었다. 제자리에 멈춰 강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붉은 불이 라더, 제멋대로 튀어나가는 초록 불이 공룡. 사이를 중재해주는 노란 불도 없이 잘도 붙어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둘 사이는 좋았다. 공룡은 시도 때도 없이 라더에게 장난을 쳤고 라더는 별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라더의 명령은 군말없이 따랐다. 공룡이 자유분방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조직 내에서 굳건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라더의 공이 컸다. 라더가 없었다면 진작 쥐도 새도 모르게 강바닥 어딘가에 파묻혔거나, 애초에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팽 당했을 게 분명했다.

"라더야."
"이름으로 부르지 마. 우리 지금 목숨 걸고 거래하러 나온 거야."
"라더야-."

대체 왜 그러는데? 라더는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공룡은 턱을 괴고 생글생글 웃었다. 부아가 치밀었다. 두 사람은 적대 조직의 바 한가운데 있었다. 조직원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머리칼도 눈 색도 완벽하게 숨겼다. 적대 조직원임을 숨기고 거래를 진행한다는 사실이 들키면 둘의 목숨 만이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전쟁이 될 게 뻔했다. 그런 상황에 공룡은 태연하게 라더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꼴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오늘은 심하다. 라더는 공룡의 멱을 잡아채 바 뒷문으로 끌고 나갔다.
신경을 곤두세우니 행동이 거칠었다.

 

악, 거친 벽돌담에 뒷머리가 부딪혀 작은 비명이 나왔다. 힘은 더럽게 세다니까. 평소에도 느끼는 거지만 라더의 눈은 날카롭다. 매섭게 노려보는 눈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라더는 뾰족한 이를 바득 갈았다. 너 미쳤어? 수 틀리면 어떤 꼴이 될 지 파악 안돼? 소곤소곤 내뱉는 목소리가 무서웠다. 하하, 공룡은 이 와중에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아프잖아. 너 때문에 나부터 죽겠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문질러닦았다. 라더는 공룡의 목을 부러트릴 듯 힘을 주었다. 이마 옆으로 두꺼운 핏줄이 툭 불거졌다.

 

"너랑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나오기 싫었는데. 보스는 왜-."

"라더야."

"또-"

"더 높은 곳에 가보고 싶지 않냐?"

 

흥분되어있던 호흡이 멈췄다. 바 안에서 흘러나오던 소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멱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능글맞게 웃는 공룡의 표정 외에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파묻혔다. 미세하게 비치던 가로등이 툭, 필라멘트 터지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저 눈빛을 안다.

공룡은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처음 조직에 들어왔을 때, 처음 받은 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라더야, 우리 어디까지 올라가볼 수 있을까? 공룡의 검은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머잖아 그들의 사수가 죽었다. 공룡은 처음으로 둘만 나간 임무에서 거래 대상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라더야, 여기서 만족해?
솔직히 별생각 없었다. 몸 붙일 곳이 필요해서 들어온 조직이었다.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충성을 다할 곳만 있으면 상관없었다. 공룡은 아니었다. 가벼운 태도 뒤에 깊은 권력욕이 있었다. 라더는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공룡이 최소한의 선은 지키리라 믿었다. 보스 바로 밑자리까지 올라온 이후에는 속내를 잘 비치지 않았다. 공룡의 권력욕이 현실에 들이박아 박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줄 알았다. 어둠 속에 녹아든 공룡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욕망이 넘실거렸다. 이럴 생각으로 극구 나와 오겠다고 했구나. 나는 못 들은 척해줄 거라는 걸 아니까. 공룡이 어떤 방법으로 직위를 높여왔는지 잘 알면서도 그 흐름에 모른 척 몸을 맡겨 흘러왔던 게 나니까. 권력욕은 없다지만 물이 흘러오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라더는 높은 곳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더 나은 처지를 원했다. 그게 우연찮게 공룡의 욕구와 맞아떨어져 묵과한 것이지, 이 이상은 아니었다. 첫 반란은 신호탄이다. 하극상으로 얻은 권력은 하극상으로 뒤집힌다. 밑에서 우글거리고 있던 것들에게 싸우라, 쟁취하리라 표어를 던져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하는 처지는 나쁘면 나빴지 전혀 낫지 않았다.

공룡은 씨익 웃으며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했다. 못 들은 척해줄 거지.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허구한 날 늘어놓는 감언이설이었다. 걱정 마. 오늘 거래는 안전하게 끝낼 거야. 내가 다 계획이 있거든. 라더를 완전히 믿는 건지 아니면 믿는 척하는 건지 당당하게 늘어놓기에는 구멍이 많은 계획들이 흘러나왔다. 공룡은 거짓말을 잘했다. 그러니 저 말들 중 유달리 구체적인 부분은, 전부 거짓이다. 치익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라더는 눈으로 담배연기를 좇았다. 공룡의 얼굴이 회색 연기에 덮였다. 웃는가. 너는 분명 웃는다. 라더는 머리칼을 헤집고는 바 안으로 발끝을 돌렸다. 공룡은 연기를 내뱉었다.

"일 끝내고 이야기하자."

*

"공룡이는 별 문제 안 일으켰냐."
"예."

"다행이네. 너희 둘을 붙여서 보내길 잘했어."

입이 거의 열리지 않은 채 말이 흘러나왔다. 중저음의 뭉툭한 목소리는 라더로 하여금 의지할 곳이 있다는 안정감을 주곤 했으나, 오늘은 경우가 달랐다. 심장 속에서 비밀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 요동친다. 보스는 알고 있을까? 공룡이 보스의 목을 노립니다. 이제까지 제 위에 있던 것들에게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걸 제가 알면서도 당신께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목젖이 크게 출렁였다. 단정하던 정장 소매가 우그러졌다.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가 라더의 불안을 잡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의자 바퀴가 바닥을 긁어내는 소리가 났다.

"라더야."
"예."
"내가 널 믿는 거 알지."
"당연하죠."


뺨에 손이 부드럽게 닿았다. 숨통이 조여들었다. 심장은 이미 터져버렸다. 갈비뼈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풀어올랐거나. 토닥이는 손길은 몸 내부에 큰 멍을 남겼다. 고막을 목소리가 찌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예. 보스. 갈색 머리칼이 어깨를 스치며 깊게 베고 지나갔다. 라더는 보스가 나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가만히 서 있었다. 쓸데없는 우정놀음은 취향이 아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심 더 높은 곳을 원하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아도 서 있을 수 있을만큼 높은 곳. 라더는 창가에 손을 짚었다. 찬 공기가 뼈로 스며들었다. 작은 차들이 믿기지 않을만큼 큰 소리를 내며 분주히 움직였다. 

*

철컥. 청명한 장전음이 울렸다.
라더는 오지 않았다. 방해하겠다 이거지. 아니면 벌써 도망갔거나. 어울리지 않게 큰 창으로 네온이 점령한 밤하늘이 보였다. 그날 물건을 들고 돌아오던 길에 라더와 이런 하늘을 봤었다. 라더는 이번만큼은 입 다물 수 없다고 말했고 공룡은 어차피 더러운 짓 하는 거, 끝까지 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빨간불이 켜졌지만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애초에 달려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멀리 달리기 위해 아예 달아놓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공룡은 입가를 쓸어 닦았다.나락에 떨어진 김에 나락 끝까지 가보자니까. 아예 치고 올라올 희망도 갖지 못하게 지하 깊은 곳까지 처박혀보자니까. 라더는 아직도 제가 숨 쉬고 있는 곳이 공기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둘 다 폐를 뜯기고 아가미가 그어진 채 지상에서 내쫓긴 처지에.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눈을 감자 살갗 안쪽에서 기분 좋은 열기가 올라왔다. 피가 뜨거웠다. 공기 중에 던져지면 수증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공룡은 그런 기분을 즐겼다. 보스의 방에 있는 넓은 창으로 밑에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보는 기분, 멱이 붙잡힌 채 창밖으로 상반신이 기울여지는 기분.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살아있으니 느낄 수 있는 기분.

 

공룡은 머릿속으로 총알의 개수를 셌다. 여섯 발. 왜 굳이 여섯 발이냐고 한다면, 그 편이 느와르 같으니까. 너 그렇게 재미 찾다가 정말 훅 간다. 라더가 투덜대는 소리가 뇌 속에서 들렸다. 이 총을 겨누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눈이 돌아가서 덤벼들지도 모른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엘리베이터가 띵, 하며 출발신호를 주었다. 출발선이 보이고, 그 앞에 붉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진짜 하는구나."

"이제와서 같이 하자고 할 건 아니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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