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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하이틴] 조우

#문체압수
쉼표
3인칭
긴 문장/세밀한 묘사 < 솔직히 좀 실패한 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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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비나 왔음 좋겠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더웠다. 찝찝한 느낌에 의미 없이 셔츠 단추를 풀었다. 한두어개 풀어헤친다고 도움될 것 없는 건 알았다. 하지만 더위에 절여진 뇌는 원래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법이다.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물러갈때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집까지 얼마나 남았지. 더럽게 많이. 가방과 등 사이에 찝찝한 습기가 가득 찼다. 손에 든 전화기는 의미 없이 수신음만 뱉었다. 공룡(물주).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얘는 왜 또 전화를 안 받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주인 허락 없이 집에 가긴 싫었다. 통보성이라도 알리긴 해야했다. 그게 나름 규칙이었다. 하지만 하필 이렇게 더운 날에 전화를 안 받을 건 뭐람. 핸드폰이 떨어진 손바닥에 꿉꿉한 습기가 남았다. 몰라. 난 분명 전화를 했고 안 받은 건 공룡이다. 나중에야 폰을 확인했을 때 찍혀있는 부재중 표시를 보고 상황을 파악하겠지. 난 살아야겠다. 이 망할 더위에서 좀 살아남아야겠다. 네 집을 휴게소로 좀 쓰겠다 이거다.

공룡은 혼자 살았다. 그걸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귓속말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모님이랑 살고 있지 않다고. 돌아가신 건 아니었다. 그냥 학교 위치 때문에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이후 공룡의 집이 아지트처럼 된 걸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다. 근데 먼저 비밀번호를 알려준 건 너잖아. 문 열어주기 귀찮다며. 생각해보면 냉장고 지분 50%는 나다. 내가 마시고 사둔 음료수만 몇 병인데.

자기합리화를 몇번씩 하다보니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열고 들어갔는데 집 안에 있다가 도둑인 줄 알고 난리치는 거 아니야? 뭐 어쩌라고. 제가 전화를 잘 받든가. 도어락 버튼이 꾹꾹 눌렸다. 시. 시. 시. 시. 띠리링. 정답. 혹시 번호를 바꿨나 했는데 아니었네. 낡은 철제문이 열렸다. 뻑뻑한 소리가 났다. 작은 거실 한가운데 인영이 앉아있었다. 집에 있으면서 전화도 안 받고 말도 안 하고. 있었냐 물어보려고 입을 여는 순간 머리칼이 동시에 흩날렸다. … 공룡이는 갈색머린데.

"뭐야. 학교에서 뭐 해서 늦는다더니 벌써 왔냐?"

빛 없는 노란 눈동자가 보였다. 상황을 받아들이는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앞의 저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도둑인가? 근데 도둑 치고는 너무 평온하게 앉아있잖아. 제 집인 것 마냥. 우당탕. 급하게 닫은 문 안쪽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핸드폰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미친놈아. 통화중입니다. 나중에 다시- 통화중입니다. 나중에- 통화중입니다. ㄴ-
쌓이는 부재중 전화만큼 속이 타들어갔다. 발자국 소리가 들린 건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넣었을 때였다.

"라더, 너 여기서 뭐하냐?"
"너 뭐하다가 이제 와?"
"학생회. 왜. 아까부터 각별 형도 난리치더니…."

아니. 별건 아니고. 아니지. 별건가. 너네 집 안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앉아있어서 놀라서.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각별 형? 도어락 소리가 다시 났다. 시. 시. 시. 시. 열린 문 틈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형체가 다시 보였다. 노란 눈이 공룡을 보더니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뭐야. 네 친구야? 깜짝 놀랐네."
"너 뭐하냐. 들어오려던 거 아니야?"
"어? 응…."

공룡이 자연스럽게 음료수 한 캔을 꺼냈다. 각별 형이라고 불린 사람이 그 곁에 서 있었다. 멀뚱히 서 있는 건 나 뿐이었다. 이거 가져가려고 왔지? 손에 들어앉은 음료수가 차가웠다. 이미 일련의 소동으로 더위는 잊어버렸지만. 공룡이 거실 가운데에 앉았다.

"그러니까- 이쪽은 각별 형. 같이 살고 있는 형이야. 원래 일 나가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쉬는 날이라더라고. 형. 이쪽은 라더. 작년 같은 반 친군데 내가 전에 자주 오라고 집 비번 알려줬어."

넌 왜 남에게 비밀번호를 함부로 알려주느냐고 질책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인가. 형이 있다고는 안했는데. 형이라기에는 너무 안 닮았기도 했고. 아니지. 저 눈에 서린 장난기는 조금 닮았나. 문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이상한 느낌이 올라왔다. 경계심인지 뭔지. 손에 닿은 차가운 음료수 때문이었다. 분명 그랬다. 본능일 수도 있고. 그것뿐이었다. 공룡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엄마가 기다리실 거야. 변명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

"네 친구 맞아?"

머리도 빨간 게 어디서 노는 애는 아니지? 나름 걱정을 가득 담았다. 공룡이는 웃더니 그거 자연머리라고 농담을 했다. 농담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새빨간 눈을 마주본 순간을 생각했다. 나 같아도 친구 집에 왔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앉아있으면 까무러치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내 존재를 미리 알리지 않은 공룡이에게는 조금 실망이지만. 생판 남인 형이랑 같이 산다고 알릴 이유가 없다는 건 동의하는 바다. 캔이 바닥과 부딪혔다. 청명한 소리가 났다. 뒷목에 습기가 말라붙었다. 일련의 사건이 지나자 다시 더위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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