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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하이틴] 명멸

 잠뜰TV 하이틴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합작 링크 : highteen.creatorlink.net/ 

 

BGM : youtu.be/YFBR0bJTKWw

깜빡.

 

어떤 일들은 정말 난데없이 일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케일이 큰 일일 수록 그렇다. 한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큰일은 정말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고 냅다 내리꽂힌다. 징조가 보임에도 애써 외면한 결과인지도 모르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러나저러나 날벼락이다. 각별의 실종이 그랬다. 각별의 눈 색을 닮은 샛노란 꽃다발이 검은 아스팔트 위로 흩뿌려졌던 게 기억이 났다. 잠뜰아. 혹시 각별이가 갈 만한 곳 모르니. 멍한 머리를 말들이 헤집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단순히 집에 제 시간에 안 들어온 걸로 실종신고를 하기에는 이르지 않느냐고 타이르는 소리, 어깨를 붙잡은 악력, 집 앞에 몰려든 사람들의 발에 무참히 짓밟히던 노란 꽃잎들. 붙잡힌 어깨가 너무 아파서인지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길. 각별은 졸업식 전 날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남겨둘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남겨두고 지워져버렸다. 줄지어 놓인 의자들 사이에 의미 없이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축하해줄 자리가 빈자리인데, 왜 극구 찾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마법 같이 사라졌으니 마법 같이 돌아오길 빌었던가. 졸업식은 지루하고, 공허했다.

 

*

 

노란 명찰을 단, 몸 보다 큰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조잘대며 잠뜰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꽤 많은 사람들은 고등학생이 초등학생, 중학생 때처럼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자라지 않는다는 걸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딱 맞는 걸 입었어야했어. 각별이 손등을 조금 덮는 길이의 소매를 접어 올리며 중얼거렸던 게 기억나 웃음이 새어나왔다. 3학년 교실이 어디더라. 4층. 각별이 허구한 날 이놈의 학교는 노인공경을 모른다며 투덜거렸었다. 매일 선생님들 눈 피해서 엘리베이터만 타고 다닌 주제에. 물론 잠뜰도 그 곁에서 덕을 톡톡히 보긴 했었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이상하게 3학년 교실은 추웠다. 유달리 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날이 서 있는 분위기. 각별은 그게 싫었는지 매번 옥상으로 향했다.

 

“오빠도 쉬는 시간에 앉아서 공부 좀 하고 그래.”

“그렇게까지 안 해도 충분히 잘 해.”

“재수 없어.”

 

각별은 피크닉 한 팩을 쭉 빨며 장난스레 킥킥거렸다. 옥상은 늘 적당한 바람이 불었다. 각별의 머리끈이 기분 좋게 흩날려 하늘에 궤적을 남겼다. 별 모양 장식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수업이 끝나고 노을이 질 때면 그 장식이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처럼 보였다. 새파란 발자국을 남기며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별. 진짜 유성처럼 스쳐지나가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릴 줄은 몰랐지만.

 

3학년 교실은 별 다를 것 없었다. 삐걱거리는 나무문도, 낡아서 가끔 고장 나는 바람에 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선을 몇 번씩 꼽았다 빼야했던 TV도, 창문 너머 풍경을 죄다 가려버리는 은색의 난간도. 그렇게 숨막혀하더니 별 거 없네. 잠뜰은 창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가 아직 비어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잠뜰은 새학기가 시작되면 늘 처음 앉는 자리로 그 해의 운을 점쳐보는 버릇이 있었다. 창가 쪽 두 번째. 교탁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 자리. 그 자리에 앉지 못했던 때가 두 번 정도 있었는데, 처음이었던 중학교 1학년 때는 쓸데없이 완고한 담임을 만나 제 안의 반골기질을 뼈저리게 확인했었다. 두 번째였던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각별이 사라졌다. 각별은 항상 네 그런 버릇이 될 일도 안 되게 만드는 거라고, 그런 거 안 믿을 거 같은 애가 왜 그러냐고 놀렸었다. 그렇게 놀리던 징크스의 희생양이 본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잠뜰은 올해는 운이 좋으려나보네. 하고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 가볍게 내려앉은 먼지를 쓸어냈다. 태양빛이 직선으로 들어와 밝은 선을 그렸다.

 

“옆에 앉아도 돼?”

 

목소리 하나가 고요에 돌을 던졌다. 아, 마음대로 해. 얼굴을 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드르륵, 낡은 마루를 플라스틱 다리가 긁었다. 천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옛 기억이 한 겹 덧씌워져 모든 소리가 멍멍했다. 책상 한가운데에 그어진 빛줄기 끄트머리에 길쭉한 손가락이 들어왔다. 탁탁. 손바닥이 책상을 때렸다.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귀에 덮인 베일이 그제야 벗겨졌다. 어, 아니야. 그냥…. 잠뜰은 형식적인 말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경험에서 미루어보건대, 새학기부터 활기차게 말을 걸어오는 족속은 대개 정상이 아니다. 시야 끝에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뒤이어 입은 회색 마이와 대조되는 흰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꽤 긴 편인 머리카락이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반가움에 반쯤 접힌 눈가 사이로 샛노란 눈동자가 빛났다. 바람이 불었다. 좀 자르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들었던 머리카락을 대수롭잖게 정리하는 손길이 익숙했다. 깜빡.

 

 

 

 

“각별 오빠?”

“오랜만이야.”

 

고등학교 3학년 봄. 각별이 돌아왔다.

 

*

 

담임은 각별의 존재를 굳이 대대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각별도 본인이 졸업식 날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진 복학생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실종될 당시 학교에 있던 사람들 중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건 잠뜰 뿐이었다. 각별은 어디선가 하얀 명찰을 구해 착용하고 다녔다. 두 살이나 어린 애들 틈에서 나이 좀 많다고 떠받들어지기 싫다는 이유를 댔다. 잠뜰은 그의 의사를 존중해 단 둘이 있을 때를 빼면 그를 그냥 ‘각별’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 생각나네. 너 오빠라고 부르기 싫다고 항상 각별이라고 불렀잖아. 버릇없다고 혼났었지. 각별은 그렇게 말하며 쪼그라든 피크닉 팩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럼 스물?”

“하나.”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갔다. 왜 없어졌던 건지, 사라진 1년 간 대체 뭘 하며 지냈는지, 다시 돌아온 이유는 뭔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심장 안쪽에서 나갈 틈을 노렸지만 잠뜰은 애써 참아냈다. 괜히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 등 뒤로 지고 있던 노을빛이 닿은 아주머니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있었는지, 모르는 걸 모른다고 답하는데도 거짓말을 할 때처럼 꽉 막혀있던 목구멍이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잠뜰은 버릇처럼 풀어진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각별은 절대 먼저 말해줄 위인이 아니었다. 아마 잠뜰이 물어보지 않는다면 평생 비밀이 될 테고 졸업하고 각자의 시간을 살다보면 그 1년은 잠뜰이 알고 있는 각별의 인생에 남은 수많은 공백 중 하나로 아무렇지 않게 덮여버릴 것이었다. 나쁘지 않다고 좋은 건 아니다.

 

“아주머니는 뭐라고 하셔?”

“뭘?”

“오빠 복학하는 거 말이야.”

“별 말 없었는데.”

 

거짓말. 잘 아네. 난리 났었어. 웃음소리가 번졌다. 각별은 학교로 돌아올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졸업식을 하루 남기고 사라졌기에 출석일수가 부족하지도 않았고, 학교 측에서도 실종 두 달이 지난 뒤 알아서 졸업처리를 끝마친 참이었다. 각별이 언제 돌아와서 언제 복학하기로 정했는지는 몰라도, 학교 측이나 각별이나 복잡한 절차를 거쳤을 것이 자명했다. 그럼에도 기어코 학교로 돌아온 걸 보니, 각별은 여전히 각별이다. 왜 그렇게 재미없다던 고등학교 3학년을 다시 보내려고 하는지, 이유를 종잡을 수 없는 것도 각별다웠다. 다 마신 피크닉 팩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쪼그라들었다.

 

각별은 겉돌지 않았다. 두 살이라는 나이차는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의미 없는 것이었고, 그 특유의 괴짜 같은 부분은 은근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잠뜰이 생각하기에도 각별이 학우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각별도 다가오는 사람을 굳이 내치는 성격은 못되었다. 각별의 3학년 생활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몰라도, 그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복학한 거라면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사라져있었던 기간 동안 나름 공부를 한 건지, 아니면 원체 머리가 좋아서 가능한 건지 모르겠지만 진도도 어렵지 않게 따라잡았다. 첫 시험에서 성적표를 받아들고 오빠는 한 번 더 배우는 거잖아. 하고 투정을 부리니 1년 동안 공부를 놓지 않았느냐며 웃었다. 재수 없어, 언젠가 했던 대화가 반복되었다. 시시하고, 재미없고, 목적도 무엇도 없는, 주제가 무의미하게 끊겼다가 반복되는 대화. 이런 대화를 한 게 얼마만이었지. 애초에 학교에서 목적 없이 입을 열었던 게 얼마만이었지.

 

잠뜰의 2학년 생활은 건조함의 연속이었다. 고등학생이라는 설렘과 기대감이 지워진 자리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생활기록부에 적힐 한 줄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 틈에서 차마 길을 찾지 못한 잠뜰은 덩그러니 멈춰있었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사이에서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작은 사회에서 휩쓸리지 않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한다는 걸 몰랐다. 바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파도는 어렴풋하게 보이던 길들을 전부 흩어놓았다. 잠뜰아. 네가 성적도 괜찮고, 다 좋은데. …추가적인 활동이 하나도 없으면, 나중에…. 잠뜰은 묻고 싶었다. 무슨 일을 할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에 맞는 활동들을 할 수가 있느냐고. 왜 다른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없으면서 있는 것 마냥 생활기록부를 일관되고 빼곡하게 채울 수가 있느냐고. 성적은 단순히 우월감의 지표가 아니라 미래를 긋는 표지판이었다. 그걸 몰랐다. 그렇게 어중간하게 뒤쳐진 상태로 1학기가 지나갔다. 여름방학 보강이 끝나고 무의미하게 채워두었던 생활패턴이 텅 비어버리자 잠뜰은 사라져버린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거라고 미리 말해주질 그랬냐는 작은 원망과 함께. 이런 생활을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겨우 빠져나가놓고는 왜 말도 없이 사라졌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

 

“넌 여기 오기만 하면 멍때리더라.”

 

매미 우는 소리 사이로 차가운 캔이 닿았다. 물방울이 맺힌 땀과 뒤섞여 바닥에 검은 얼룩을 남겼다. 근처에 큰 나무도 없는데 매미는 어디서 그렇게 우렁차게 우는지 모르겠다. 운동장 근처에 구색 맞추기로 심어둔 작은 나무에서부터 올라온다기에는 귀 바로 옆에서 우는 듯 따가웠다. 치익, 탄산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청명했다. 에어컨이 틀어져있는 거실보다 태양이 내리쬐는 옥상이 더 시원했다. 더운 공기를 실은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 몇 장이 떨어졌다. 각별은 옥상 가장자리로 가 허리 정도 오는 난간 역할의 벽에 몸을 기댔다. 검은 머리칼이 보기 좋게 흩날렸다. 따지 않은 음료수 캔이 아슬아슬하게 벽 위에 올라가있었다. 웬일로 피크닉이 아니라. 잠뜰은 차가운 캔을 뺨에 대고 중얼거렸다. 운동장에서 흙먼지가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각별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면 이전이나 지금이나 각별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못하는 편도 아닌데 항상 점심시간이면 옥상에 올라와 잠뜰과 시간을 보냈다. 잠뜰이 내 자유는 어디있냐며 성을 내도 웃기만 했다. 너도 답답하잖아?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10분, 10분, 10분, 60분, 10분, 10분. 그 짧은 자유시간이 학교생활 중 가장 짜릿하고 시원한 순간이라는 건 맞았으니까. 뇌물로 받은 죄 없는 피크닉 팩만 구겼다. 각별은 어느새 제가 해설위원이라도 된 마냥 중계를 하고 있었다. 아, 저기서 차서 누가 넣겠어? 제가 국가대표여도 거기선 못 넣겠다. 오, 쟨 좀 잘 하네. 우리 반 아니었나? 할 일을 찾던 잠뜰은 어느새 그 옆에서 같이 그 엉성한 친선경기를 관람했다. 간간히 흙먼지가 날려 시야를 가렸다. 월드컵과 흡사한 함성소리도 들렸다. 타이밍 좋게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뜰은 엔진 소리를 타고 시선을 돌렸다. 각별도 타이밍 좋게 마주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오가던 호흡이 뚝 끊겼다. 정적이 찾아왔다.

 

 

 

 

“왜?”

 

*

 

여름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임에도 하늘이 파랗기 그지없었다. 어깨에 멘 가방이 두 배의 중력을 받아 계속 밑으로 꺼졌다. 너 그렇게 무거운 가방 메고 다니다가 키 안 큰다. 귓가로 쌩 하니 바람이 불었다. 각별은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사라지기 전에는 자율학습을 한다고 늘 밤늦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던 거 같은데. 종례 종이 울리자마자 가방을 들쳐 메고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생각해보면 전에 하던 게 이상한 거지. 각별은 그런 사람이다. 한 곳에 잠시라도 갇혀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쉬는 시간 10분, 그 10분 동안 푸른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지 않으면 질식하고 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각별은 다시 학교로 돌아올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밤길을 밝힌 가로등 불빛을 응시했다. 옥상 위에서 본 각별의 눈이 딱 저랬다. 태양을 등진 그림자 틈에서 그 눈만 빛났다. 그 눈만 유성처럼 남기고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번 사라진 적이 있는 사람이라서인가. 아침이 오면 서 있던 그 자리에 노란 별 조각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사라진다고. 잠뜰은 각별의 학교생활에서 이질적이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잠시 눈을 감고 되짚었다. 각별은 교실 내에 잘 녹아들었다. 잠뜰이 그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냥 시기 맞추어 전학 온 학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얼굴도, 말투도, 행동거지도 모든 게 잠뜰이 아는 그대로였다. 1년 전, 졸업식 전날에 멈추어있었다. 예전에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봤던 영화 내용이 떠올랐다.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홀로 성장해 어른이 되어 돌아온 아이. 그 반대인가. 각별은 어른이 되지 않았다. 19살. 그때에 멈춰있는 것 같았다. 잠뜰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각별은 그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정확하게는, 어른과 아이의 어중간한 사이에 멈춰있었다. 학생이라는 명찰을 단 어른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잠뜰은 철제 대문을 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 년 사이에 사람이 얼마나 변하겠는가. 매일같이 보던 시간 틈에 작지 않은 공백이 생겼기에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을 뿐이다. 교복을 입고 있으니 더 그렇게 보였을 뿐이고. 비과학적인 무언가에 신경이 뺏길 틈이 없는 나이였다. 함부로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겁이 너무 많은 나이였다. 녹슨 경첩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불이 응답하듯 켜졌다. 귀가 인사를 건네기 위해 입을 열었다.

 

*

 

7번째 모의고사가 끝났다.

 

잠뜰은 뻐근한 눈을 비비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널었다. 각별은 어느새 책상 위에 걸터앉아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너 수능 때도 이럴 거냐? 그럴 거 같은데. 지금보다 더 지칠 거야. 그럼 그냥 끝나고 그 자리에 죽어서 발견될래. 시덥잖은 살벌한 농담을 쏟아내는 입을 시험지가 덮었다. 미쳤나봐. 잠뜰은 제 얼굴을 폭삭 덮은 시험지를 신경질적으로 거두어 구겼다. 그거 내건데. 각별의 지나가는 말에 급하게 도로 펼쳤다. 검은 펜으로 대충 구색만 맞춰서 동그라미를 친 게 눈에 띄었다. 빨간 펜으로 하는 성의라도 보이지. 안 가져와서. 대충 눈으로 페이지를 훑었다.

 

각별은 성적이 좋았다. 가끔 3학년 교무실로 갈 때면 곳곳에서 각별의 이름이 들려왔다. 각별 학생, 이번에 학교장 추천 써볼만 하지 않아요? 각별 학생이랬나. 서울권은 쉽게 가겠는데. 간간히 감사하다며 뒷목을 만지작거리던 모습도 기억났다. 기뻐보였나. 이상하게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 옥상에서 그걸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수시 넣었어? 응. 일단은. 몇 개 넣었어? 오빠 성적이면 굳이 꽉꽉 채워 넣을 필요 없잖아. 글쎄. 그런 시답잖은 대화가 오갔던 걸 떠올리자 다시 의문이 피어올랐다. 각별이 어느 대학에 붙었더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어렴풋이 들었던 이름들을 생각하면, 아주머니의 성격 상 동네에 잔치라도 열려고 했을텐데. 수능 날까지 조용했다. 각별이 사라지는 그 날까지 마을은 조용했다. 각별도 잠뜰도 말하지 않았다. 굳이 각별이 입을 열지 않으니 잠뜰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오빠, 이번에 수시 어디 넣었어?”

 

재작년에 넣은 거기? 담임이 오빠 성적을 보고 가만 냅뒀을 리가 없는데. 각별은 잠뜰의 손에서 시험지를 장난스럽게 빼앗아가고는 가만 시선을 위로 굴렸다.

 

“안 넣었어.”

“담임이 가만히 뒀어?”

“아니. 담임은 몰라. 전형료 안 넣고 그냥 빼버렸거든.”

 

왜?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각별은 웃기만 했다. 저물기 시작한 태양이 창틀 사이로 빛을 쏘아보내 각별의 얼굴 반절을 가려버렸다. 이질감이 들었다. 이대로 각별이 사라져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뜰은 멍하니 각별의 눈을 바라보았다. 노란 눈동자가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났다. 머리에 묶은 노란 별 머리끈이 반짝거렸다. 깜빡.

 

“오빠.”

 

잠뜰은 급하게 각별의 손목을 붙잡았다. 실재를 확인해야만 이 이상한 감각이 해소될 것 같았다. 각별은 제 손목을 붙잡은 손과 일그러진 잠뜰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어투로 웃었다.

 

“오빠 왜 그래?”

 

왜 또 그렇게 사라져버릴 것처럼 굴어?

 

각별은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

 

학생이라는 신분은 꽤나 편리하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흘러가는대로 흘러가다보면 종착지에 닿는다. 각별은 그렇게 흘러왔다. 운 좋게 얻은 비상함이 박차를 가했다.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다. 학생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기 직전이 될 때까지, 각별은 그렇게 흘러왔다. 비상한 두뇌를 칭송 받으며, 학교의 자랑거리도 되어보면서, 모자란 것 없이. 행복하진 않았지만 불행하지도 않았다. 사각형 교실의 답답함에 숨이 막힐 때 쯤에는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빈도수가 늘어가는 걸 알았지만 자제하진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버텼다. 버티고 있는 중임을 알지 못하고 버텼다. 잠뜰이 우연히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음을 알고는 잠뜰도 옥상으로 불렀다. 잠뜰과 각별은 본질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잠뜰은 말로는 공부해야한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옥상의 공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빠는 졸업하면 뭐 할 거야?”

 

날카로워지기 시작한 가을의 바람을 맞으며 물어왔다. 오빠는 좋겠다. 뭘 하든 할 수 있겠네. 수시에서 하나는 붙을 거 아니야. 잠뜰의 자조 섞인 말들이 지나가는 동안 각별은 입을 다물었다. 노을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뭘. 글쎄, 뭘 해야하지. 이 파도에서 벗어나고 나면. 바다에서 벗어나 육지에 내던져지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억지로 고개를 돌렸던 질문들이 노을과 함께 피어올랐다. 너는 이제 어떻게 살 거야? 길이 보이긴 해? 어디로 갈 거야?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순 없어. 때 이르게 푸른 하늘 가운데에 처박힌 별 하나가 깜빡였다. 어떻게 할 거야? 한 번 더 깜빡였다.

 

수능 날의 칼바람에 뺨이 에었다. 매년 수능 날이면 손이 얼어붙었다. 잔인한 성인식 날 날씨마저 잔인할 필요는 없는데. 숨을 내쉬자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다 떨어져 빰에 달라붙었다. 손에 들린 가채점 표가 그대로 구겨졌다. 각별은 그 표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숫자들이 열 맞춰 나열된 표를 응시하다가, 그대로 손에 힘을 풀어 떨어트렸다. 바닥에 속절없이 달라붙은 종이를 발로 짓밟았다. 교문 밖을 나서는 발걸음이 이질적이었다. 그저 늘 하던 그대로, 매달 하던 그대로 시험을 보고 나왔을 뿐인데, 제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정신만 놔두고 한 꺼풀 벗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수고했다며 칭송하는 모든 인사들이 현실 같지 않았다. 각별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육지에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시간이 흘러 성적표를 받고, 졸업식 날짜를 받고, 각별은 사라질 준비를 했다. 계획은 없었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매일 밤 빌었다. 눈을 뜨면 처음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그 처음이 언제라도 좋으니. 미래로 나아가지만 않게 해달라고.

 

*

 

잠뜰은 얼어붙은 손끝을 문질렀다. 학교는 한창 샤프심 부러지는 소리와, 합격 소식에 열광하는 소리 둘이 극단적으로 다투고 있었다. 환호소리에 지지 않겠다는 듯 책장 넘기는 소리가 강해지곤 했다. 환호소리는 가끔은 울음소리로 변했다. 그 사이에 각별 혼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잠뜰은 각별을 피했다. 그제서야 보였다. 각별은 제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정 이상으로 관계를 맺지 않았다. 무언가 개인 물건을 남기지도 않았다. 필통 하나 없이 그냥 아무 편의점에서 산 컴퓨터용 사인펜 하나, 지우개 하나, 샤프 하나. 샤프심 한 통. 아무에게도 물건을 빌리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않았다. 1학기가 지나고 사용하지 않게 된 교과서들은 불태워버렸다고 했다. 들었을 땐 농담인 줄 알았지만 하는 행색을 보니 진짜였다. 각별은 다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년 전과는 다르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잠뜰은 각별을 붙잡지 않았다. 또 떠나버릴 거라면, 그렇게 사라져버릴 거라면 그냥 사라져버리라지. 괘씸하다는 생각 하나, 눈앞까지 닥친 수능이라는 큰 시험에 정신을 뺏긴 게 하나. 피터팬이 되고자 하는 작은 별을 붙잡아줄 웬디는 되고 싶지 않았다. 잠뜰은 굳이 따지자면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 답답한 우리에서 벗어나길 누구보다 기다리는 쪽이었다. 육지로 나가서, 태양빛을 받으며 어디로든 달리고 싶었다. 길을 잃는 건 무섭지 않았다. 바다 속에서 길을 잃어 숨막혀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육지로 나가기 위해 펜을 들었다. 바다 속에 길이 없다면, 육지에는 분명 있을 거라고. 잠뜰은 그렇게 믿었다. 각별은 잠뜰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내내. 잠뜰이 갑작스럽게 그를 피하기 시작한 것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에 남은 흔적을 지워가던 그였으니, 알아서 잊어준다면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옥상 위에는 그림자가 하나만 남았다. 잠뜰은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검은 글씨를 적어내렸다. 각별이 자리를 비우든 안 비우든, 신경 쓰지 않았다. 깜빡.

 

“잠뜰아.”

 

수험표를 손에 들고 교문 안에 막 들어선 잠뜰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각별이 손을 흔들었다.

 

“수능 안 보는 거 아니었어?”

“너 보러 왔어.”

“날 왜. 어차피 떠날 거라면서.”

 

잠뜰아. 각별이 교문에 몸을 삐딱하게 기댔다. 침묵이 오갔다. 나 시간 없어. 곧 입실 마감이야. 잠뜰아.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 각별의 노란 눈이 잠뜰을 응시했다. 저 노란 눈은 언제나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너무 깊어 빛이 닿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더 깊은 곳에서 태양보다 밝은 빛을 내곤 했다. 잠뜰이 먼저 침묵을 깼다. 저 눈이 더 이상 자신을 꿰뚫어보도록 놔둘 수 없었다. 들어갈게. 잘 가. 다급히 튼 고개 뒤쪽으로 각별이 말했다. 기다릴게. 너도 떠나고 싶잖아. 깜빡.

 

*

 

종이 울렸다. 텅 빈 책상에 텅 빈 머리가 엎어졌다. 12년의 세월이 몇 장의 종이들 위에 고스란히 뿌려졌다. 해방감과 또 다른 것이 그 빈 자리를 채웠다. 잡념이 들어갈 자리가 나자 끝없이 증식했다. 몇 시간 전 각별이 남겼던 말이 손끝을 빙빙 돌다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기다릴게. 뭘? 내가 육지의 햇빛에 말라비틀어져 다시 바다로 돌아갈 날을?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상념들을 모조리 쓸어 가방에 담았다.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어깨가 훅 땅으로 꺼졌다. 빈 자리를 채운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으나 감히 그러지 못했다. 함부로 들추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들이 속을 채웠다. 입을 벌렸다. 아, 이제, 육지다.

 

*

 

눈이 내렸다. 희여멀건한 입김이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에 섞여들었다. 각별은 그 자리에 있었다. 성년의 문턱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있었다. 뒤로 한 발자국, 다시 앞으로 한 발자국. 다시 선 끝자락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막막했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느껴졌다면 나아가볼 수 있었을까. 각별은 눈을 감았다. 머리끈에 붙은 별장식이 바람에 날리다가 흩어졌다.

 

“오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올 줄 알았어. 잠뜰이 적당한 부피의 가방을 들고 문턱에 섰다. 폐에 차가운 공기가 뾰족하게 파고들었다. 벽을 붙잡고 기침을 쏟아냈다. 눈 밑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각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문 너머 잠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뒤편에서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겨울이라 그런가. 순식간에 세상이 어둡게 물들어갔다. 그 사이에서 각별의 눈이 노랗게 빛났다. 불어온 바람에 노란 별이 하늘 가운데로 솟았다가 떨어졌다. 깜빡. 잠뜰이 숨을 정리하고 허리를 폈다. 밤하늘에 별이 있었다. 깜빡. 노란 별이 주기적으로 깜빡거렸다. 발이 문턱을 넘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까? 각별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학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돌아오지 않을 어린 시절에 어설프게 끼어들고 싶어질까? 잠뜰은 입술을 깨물었다. 각별이 웃었다. 깜빡. 공기가 흔들렸다. 별이 깜빡이다가 구름에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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