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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전설 합작] 그 해변에는 인어가 살고 있대

뜰팁 전설 합작 참여글입니다. 합작 링크 :

글 : 옌(@YEN_DdeulT) / 그림 : DUA (@dua_1115)


 

아이는 종종 환각을 본다.

 

정확하게는 상상을 실제처럼 보는 것이지만, 무엇이든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제로 본다는 점에서 환각과 다를 바 없다.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기에 상상과 세상의 경계에서 자유롭다. 상상의 종류는 다양하다. 책에서 보았던 요정, 침대 밑에 떨어져있던 인형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괴물, 또는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속 진위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라더의 환각은 이야기를 타고 왔다.

 

*

 

푸른 지붕들이 늘어서있는 작은 마을의 오솔길로 새어나가는 바람을 따라가다보면 금방 파도소리가 들렸다. 하얀 모래들이 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포말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해안선을 따라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멀지 않은 곳에 부두가 있었다. 파란 물 위로 회색의 철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녔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배에 오르는 선원들은 가끔 해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 간식거리를 건네주었다. 그 것을 노리고 해변에 죽치고 앉아있는 아이도 있었다. 선원들과 안면이 트이면 트일수록 받는 것도 많아졌다. 시내와 멀리 떨어져있는, 놀 거리가 충분하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사소한 기쁨이었다.

 

오른쪽에는 숲 끝,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바다 바로 위에 있었다. 마을의 파도는 잔잔한 편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절벽 밑에서는 매서웠다. 수많은 암초가 물을 돌게 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저 절벽 밑에 괴물이 살아 근처에 가는 사람들을 전부 사라지게 만든다고 떠들어대곤 했다. 숲에 갔다가 바다로 가서는 안된다는 이상한 규칙까지 생겨났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자라면 사라질 법도 한데, 이야기의 생명은 의외로 질겼다. 이야기에 사소하게 살이 붙고 선원들의 멜로디가 붙으니 전설이 되었다. 괴물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타더니 인어가 되었다. 그 마을의 전설은 그렇게 생겨났다.

 

*

 

차창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소금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인상이 더 날카로워졌다. 누군가가 보면 기분이 나쁜가보다 오해할 만한 인상이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낯선 환경이 자신을 밀어내는 것 같아 예민해졌을 뿐이었다. 푸른 지붕들 사이로 오후의 햇살을 받아 금색으로 빛나는 수평선이 드러났다. 소금 냄새의 출처는 바다였다. 드넓은 바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입가에 웃음이 드리워졌다.

 

“라더야. 바다가 마음에 들어?”

 

조수석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이 마을이 우리가 한동안 지낼 곳이야.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넓은 앞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만큼 따뜻한 목소리들이 라더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어느새 덜덜거리는 엔진소리가 사그라들고 문이 열렸다. 작지만 야무진 발이 바닥에 자잘하게 깔린 돌무더기를 밟고 섰다. 바다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해변과 가까웠다. 파도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아버지가 라더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훌쩍 들어올려 목마를 태웠다. 훅 높아진 붉은 눈동자에 푸른 바다가 걸렸다. 해수의 상쾌함을 담은 바람이 기분 좋게 밀려들었다.

 

마을은 작은 규모였지만 갓 8살이 된 라더가 처음 만나는 사회로는 완벽한 공간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이 조금 걸렸지만 오해는 함께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고 물에 뛰어들며 빠르게 씻겨나갔다. 라더는 빠르게 마을에 적응했다. 낮에는 학교와 해변에서 뛰어놀았고 밤에는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별을 세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라더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바다 깊이 들어가 헤엄치는 일이었다. 발을 붙잡고 있던 모래들이 몰려오는 파도에 씻겨나가고, 소금기 어린 물살이 겨우 뜬 눈을 툭, 툭 건드렸다. 뻗는 팔에는 간간히 해초가 걸렸다. 물 밑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은 언제나 기분 좋게 일렁거렸다. 라더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바다에 몸을 뉘인 채 있다가 수평선에서부터 해가 녹아들어오는 것을 보고나서야 젖어 묵직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육지의 중력에 몸을 맡겼다. 바다는 라더의 공간이었다. 마을의 모든 공간 중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었다.

 

*

 

“라더야. 너 그 이야기 알아?”

 

책상에서 갓 일어나자마자 공룡이 비밀스럽게 말을 걸었다. 마치 말해서는 안되는 것을 말하는 양 조심스럽게 귀에 손을 가져다댔다.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아하니 분명 며칠 전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빙빙 떠돌던 전설에 관한 이야기가 분명했다. 라더는 그 흐름에 잘 끼어들지 않았지만, 어린 아이들은 으레 제 목소리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인어. 소란 틈에 가장 많이 들려온 단어는 인어였다. 공룡이 말을 이었다.

 

“수현이네 옆집 선원 아저씨가 해준 이야기인데, 숲 쪽 해안 절벽에 인어가 산대.”

 

자세한 내용은 이랬다. 먼 옛날부터 이 마을 해변에는 인어가 살고 있고, 그 인어의 집은 해안 절벽 밑에 있다. 그 밑에만 심하게 파도가 치는 이유도 인어를 숨기기 위해서다. 인어는 숲의 냄새를 싫어해서 숲의 냄새를 바다로 끌고 들어오는 사람을 잡아가버린다. … 한껏 목소리를 내리깔고 겁을 주던 아이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경고로 말을 끝냈다. 너는 바다에 자주 가니까, 절대 숲의 냄새를 묻히고 가지 않게 조심해야해. 복도에서 어서 집에 가자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입이 떨어진 곳을 다른 소음들이 가득 채웠다. 어느새 교실에는 라더 혼자 남아있었다. 태양이 교실 안을 반으로 갈랐다. 책가방을 어깨에 반만 들쳐메고 뛰어나와 문을 닫아버렸다.

 

*

 

“또 바다에 가려고?”

“네.”

“이제 곧 가을이야. 해가 지고 추워지기 전에 돌아와야한다.”

“네, 엄마. 금방 돌아올게요!”

 

땡그랑, 문이 닫히면서 걸어둔 종이 울렸다. 종소리가 남긴 잔향이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 실려나갔다. 조약돌이 늘어선 길을 지나 해변에 다다랐다. 태양이 수평선과 가까웠다. 라더는 빠르게 웃옷을 벗어던지고 바다에 발을 담갔다. 늦여름의 바다는 유독 차가웠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냉기가 묶였다. 라더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달렸다. 물이 전신을 잡아당겼다. 팔을 뻗고 당겨올 때마다 작게 파도가 일었다. 물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소금기 가득한 물이 귀와 눈으로 몰려들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던 갈매기 소리가 먹먹해졌다. 라더는 본격적으로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을 뒤집어 하늘을 바라보니 구석에 노을빛이 어른거렸다. 일몰이 가까워지자 급해진 마음이 몸을 재촉했다. 늘 가던 그 곳까지만. 라더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안전선을 가볍게 잡아 넘었다. 아른거리던 바닥이 급격이 깊어졌다. 발이 닿지 않는 한가운데에서 물속에 녹아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황혼의 하늘이 수면에 산란되어 오묘한 색을 냈다. 라더는 그 색이 좋았다. 자신이 겪어본 적 없는 미지의 시간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마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향수를 느낄 어떤 시간으로.

 

해의 형체가 거의 사라져갈 때쯤 라더의 시야에 무언가가 걸쳤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 무언가가 빛무리를 살짝 가리고 지나갔다. 지느러미. 어둠이 작게 남은 태양을 제외한 모든 시야를 삼켜버렸기에 그것이 아주 먼 곳에서 움직인 것인지 눈 바로 앞에서 헤엄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라더는 손을 뻗었다. 몸에 작게 붙어있던 공기방울이 완전히 떨어졌다. 벌린 입에서 공기가 맥없이 흘러나와 눈앞을 흔들었다. 그 틈을 타서 그것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일말 남아있던 태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물속에서 색을 가진 것은 라더의 눈앞에서 흔들리는 본인의 붉은 머리카락 뿐이었다. 해가 졌다. 돌아가야지. 수면을 향해 고개를 들고 팔을 뻗었다. 별이 총총히 박힌 보랏빛 밤하늘이 물 흔들리는 파동에 맞추어 깜빡였다. 유독 파도가 강해 똑바로 오르기가 힘들었다. 물 전체가 무언가에 의해 강하게 밀려나고 있었다. 바람보다 무거운 무언가가 물을 밀어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손끝이 수면을 뚫고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한 공기를 마주한 순간 훅, 하고 가까워졌다.

 

굳어버린 뺨을 부드러운 무언가가 건드렸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해초처럼 흔들렸다. 희미하게 들어오던 빛마저 다가온 것에 가려 사라졌다. 시선을 충분히 아래로 내린 후에야 눈앞의 것이 생물이라는 걸 알았다. 몸체로 추청되는 실루엣이 보였지만 다리는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 쪽으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긴 지느러미가 끝까지 뻗어있었다. 그제야 제 뺨을 감싼 것이 해초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머리카락이었다. 갈색의 긴 머리칼. 라더의 몸 바로 앞에 놓인 것은 얼굴이었다. 형체를 마주한 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어 입 안으로 물이 들어찼다. 바다 깊은 곳의 색을 그대로 담은 검푸른색 눈동자가 데굴거리다가 라더의 붉은색을 담았다. 난생 처음 보는 색을 눈에 가득 담듯 빤히 응시했다. 물살이 흘러넘쳐 폐를 가득 채웠다. 숨이 막혀 흐려지는 감각 끝에 몸을 감싸는 무언가를 느꼈다.

 

라더는 그날 밤 해변가에서 발견되었다. 물을 많이 마셨지만 기적적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다. 힘겹게 눈을 뜨고 시야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부모님이 보이자마자 라더는 입을 열었다. 나, 인어를 봤어요.

 

*

 

소금기를 담은 숲의 바람이 기분 좋게 열린 창으로 날아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무거운 상자를 툭 내려놓고 바람에 눈을 감았다. 해안절벽에 파도가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시원했다. 라더는 짐을 대충 정리하고 절벽 끝으로 달렸다. 어린 시절 보았던 수평선이 그대로 그 자리에 빛났다.

 

라더가 어느정도 자라자 라더의 가족은 마을을 떠났다.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기억이 영향을 미쳤는지, 다음에 지내게 된 마을은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있었다. 처음에는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매일같이 칭얼거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투정을 할 새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차차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새 학교도, 새 친구들도 좋았다. 인어에 대한 이야기는 바다를 볼 일이 거의 없는 새 친구들에게 다가갈만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어줄 수 있었겠지만, 라더는 고의적으로 해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라더는 아이보다는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어 같은 건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는 걸 책 속에서, 신문 속에서 지겹도록 들은 후였다. 인어라니. 그런 이야기는 어린 날의 상상 속에나 있어야만 했다. 입 밖으로 내기에는 너무 허황된 이야기였다. 라더는 그날 보았던 것들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차차 수정해나갔다. 뺨을 건드린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은 햇빛에 변색되어 흘러다니던 해초로, 끝을 알 수 없는 해저로 뻗어있던 큰 지느러미는 오랜 잠수로 인한 산소부족과 그날 들었던 ‘전설’이 합쳐진 결과물로. 하지만 그 눈. 심해보다 깊고 어두웠던 그 큰 눈은 설명되지 않았다. 어린 환상이라고 잊어버릴 쯤에 눈동자가 무의식 끝에서 일렁거리면서 기억을 끄집어냈다. 기억이 끄집어내지길 몇 십 몇 백번 반복한 후에야 라더는 그 ‘인어’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받아들이고 나서야 가슴 속에 들끓던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눈동자에서부터 밀려들던 경외심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다시 새롭게 피어올랐다. 그날의 푸른 공기와 몸을 죄던 수압까지. 모든 게 눈 앞에 도로 어른거렸다.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간다면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의미 없는 기대도 함께. 텅 비어있던 심장 한 켠의 소재를 그제야 깨달았다. 라더의 조각 하나는 그날 그 바다 깊은 곳에 수장되어있었다. 인어가 손아귀에 쥔 채 깊은 바닷속으로 도망가버렸다.

 

결국 라더는 바다로 돌아왔다. 전설의 근원지인 해안절벽 위에 작은 집을 구했다. 뒤에서는 숲바람이, 앞에서는 해풍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공간이었다. 수평선에서부터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라더는 절벽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린 날의 환상에 발목이 잡혀 다시 돌아오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풍경은 예쁘네. 혼자 살기에는 적적하니 최적인 공간이었다. 해질녘 보라색과 주황색이 뒤섞여 어른거리는 하늘이 아무 방해 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가 녹아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바다도 볼만했다. 이래서 바다를 사랑했다. 푸른색, 은색, 금색이 한데 뒤섞여 일렁거리는데도 어지럽거나 난잡하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웠다. 인어가 나타나지 않아도 이 풍경 속에 다시 녹아들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더는 태양에 눈을 고정했다. 주황색 덩어리가 천천히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라더는 눈을 감았다. 붉은 잔상이 기분 좋게 유영했다.

 

첨벙.

 

무언가 수면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났다. 라더는 급하게 눈을 뜨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작은 물고기 정도가 뛰어오르는 소리는 아니었다. 무언가 큰 것이 수면을 건드렸다. 큰, 지느러미가. 파동의 중심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형체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빼앗긴 심장의 조각이 미친듯이 뛰었다. 다리가 제멋대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숲의 나무토막이 발을 묶었지만 달렸다. 뺨과 팔이 나뭇가지에 잔뜩 긁혔지만 아프지 않았다. 라더의 머릿속은 오로지 바다와 인어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숲의 냄새를 바다로 끌고 오는 사람은 잡아먹어버린대. 어렴풋이 들었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다가 나뭇잎이 스침과 함께 씻겨나가버렸다. 잡아먹힌대도 무슨 상관인가. 이미 그 인어에게 심장의 일부를 잡아먹히고 말았는데.

 

맨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침범했다. 신발은 숲 어딘가에 벗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있던 하늘에는 흰 달이 빛났다. 달의 중심에 실루엣이 있었다. 거대한 인간, 이어진 끝에 커다란 지느러미가 있는 인간. 인어. 라더는 홀린듯이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인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지는 모르나, 입이 먼저 열렸다.

 

“저기요!”

 

부딪힐 곳 없기에 메아리 없이 소리가 곧게 뻗어나갔다. 실루엣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 뿐이었지만 눈이 마주쳤다고 믿었다. 찬 바닷물이 종아리를 휘감았다. 물살이 다리를 붙잡아말렸다. 라더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여 휘감아오는 해초와 물결을 뿌리쳤다. 실루엣이 가까워졌다. 가까워질수록 파고가 높아졌다. 인어가 헤엄쳐오고 있었다. 라더의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다. 물이 어느새 명치를 적실 쯤이 되자 실루엣은 상당히 가까워져있었다. 머리의 반이 물속에 잠겨있었다. 머리칼과 눈, 지느러미만 보였다. 고래의 것을 닮은 지느러미가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라더는 적당히 가까워졌다는 걸 느끼고 입을 열었다.

 

“나를 기억해요?”

 

우리 그날 만났었죠. 물속에서 나를 보고 다가왔잖아요.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니었어. 당신이 전설 속의 인어죠. 맞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입이 움직였다.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예요? 내가, 인류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곳에 있었던 거예요? 입을 움직일 때마다 발이 물 깊은 곳으로 몸을 이끌었다. 인어에게. 더 가까이. 더. 인어가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인간의 몸이 달을 완전히 가렸다. 라더는 고개를 들었다. 인어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의 긴 머리칼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푸르고 하얀 피부가 달빛을 등지니 피부보다는 가죽에 가깝다는 게 보였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귀가 있을 자리를 가렸다. 자세히 보니 애초에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팔인지 다른 지느러미인지 모를 것이 머리카락 틈으로 길게 내려와있었다. 파란색이었다. 높은 파도가 그 몸에 부딪힐때마다 하얗게 일어나 부서졌다. 허리 밑으로는 꼬리였다. 짙은 푸른색의 고래 꼬리, 아니 지느러미. 지느러미 끝은 여전히 달에 가까웠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사람 하나쯤은 우습게 덮을 수 있는 크기였다. 긴 편인 속눈썹에서도 물이 떨어졌다. 눈꺼풀이 역으로 감겼다가 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눈.

 

 

 

 

검은 눈 안에 빛이라고는 붉은 머리칼뿐이었다. 심해보다 어둡고 밤보다 깊은 눈동자가 라더의 눈과 다시 마주쳤다. 들려오던 파도소리가 멈추고 숨이 목 끝에 턱 걸렸다. 어릴 적 물속에서 마주쳤던 그 눈동자와 똑같았다. 이어진 눈동자 틈으로 수많은 것들이 도로 밀려들었다. 아름다운 것을 향한 본능적인 경외감과, 고양감. 그 외 가지갖것들이 어릴 적의 기억과 함께 깊은 곳에서부터 끌려올라왔다.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멈췄던 숨을 입을 열어 억지로 뱉어냈다. 이리저리 뒤섞인 것들이 숨과 함께 빠져나가자 그 밑에 가라앉아있던 뭉친 감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둡고 질척한, 검은 덩어리. 평생 기저에 깔려있던, 무엇보다 본능에 가까운 감정.

 

그것을 깨닫자마자 다리에 맥없이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물속에 고개가 잠겼다. 라더는 급하게 팔을 내저었다. 어떻게든 인어에게서 멀어지려고 맥없이 휘날리는 모래를 다급하게 짚어 달렸다. 물이 몸을 붙잡았다. 경악이 입을 벌려 물을 속절없이 들이부었다. 짠맛이 입과 코를 점령해 의식을 빼앗았다. 다리를 움직여 휘감아오는 해초와 물결을 뿌리쳤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옷자락이 마른 모래사장에 철퍽 떨어지고 입에 모래가 달라붙었다. 곁눈질로 바라본 인어는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여전히 라더를 비추었다. 물이 가득 찬 어항 속에 갇혀버린 것과 같은 답답한 기분이 다시 한번 목을 죄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을 움직여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달렸다. 도망쳤다. 등을 돌렸음에도 검은 눈동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라더는 달렸다. 집으로 가는 길의 옆과 앞에는 항상 바다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 인어의 그림자가 똑같은 모양으로 서 있었다. 라더는 눈을 감고 숲의 나무들을 헤쳐 달렸다. 라더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설에는 이유가 있다. 전설은, 평생 전설로만 남았어야했다. 절대로 다가가서는 안되었다. 검은 눈동자가 계속해서 라더를 따라왔다. 우웅거리는 큰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라더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라더는 어린 날의 환각을 되새겼다. 인어는, 숲의 냄새를 바다로 끌고 들어오는 사람을 잡아가버린다. 라더는 잡아먹혔다. 인어에게 심장을, 이성을 뜯어먹히고 말았다. 라더는 집 문을 닫고,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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