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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

[심판자] 제1법칙

뜰리오트로프의 규칙을 준수하세요. 1. 절대로…

손가락 하나로 선고가 내려진다. 범죄자는 발악하지 않는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증거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말 뿐인 부정은 기록을 이길 수 없다. 몇번씩 잡혀들어온 범죄자의 경우는 더 쉽다. 그들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결코 저 굳게 닫힌 셔터가 도로 열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발 조금이나마 형량을 줄여주십사 애원하는 것 외에는, 그들 입에서 나올 말은 없다.

라더는 감시자가 천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사사로운 사족을 달지 않았으며, 신입 감시자들이 흔히 그러듯 물질에 목을 메지도 않았고, 눈썰미도 좋았다. 실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실적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옆 자리가 바뀌고, 조수라는 이름으로 곁에 붙어 감시하는 다른 감시자가 바뀌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편리하게도 그는 그 흔한 공명심이라든지, 권력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뜰리오트로프의 규칙에 충성했다. 그저 하루 종일 CCTV 화면을 보고,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범죄 등급에 맞는 수용소에 집어넣고. 간혹 죄를 깎아달라며 금품을 내미는 사람들에게는 더 높은 등급의 수용소를 들이밀고. 더 많은 부도 더 높은 지위도 불필요했다. 뜰리오트로프의 규칙에 충성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변화의 물결은 제법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라더는 퇴근길 구석을 메우는 인파가 점점 많아짐을 쉽게 눈치챘다. 수면이 고요할수록 파장이 큰 법이다. 침잠해있던 불안과 의심이 때를 놓치지 않고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물결에 휩쓸리는 건 일반 시민 뿐만이 아니었다. 증명이라도 하듯 감시자의 절반 이상이 교체되었고, 새로운 신입 감시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라더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 일반 시민이 아닌 감시자를 향한 CCTV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지만, 감시자 역시 사무실을 벗어나면 그냥 일반 시민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몇가지 가이드라인이 주어졌다. 신입 감시자의 경우 유예를 둘 것. 간단한 경고를 주고, 일정 한도를 넘을 경우에만 규칙대로 처벌할 것. 라더와 함께 그 업무를 맡은 일부 감시자들은 어째서 뜰리오트로프의 규칙이 예외를 두느냐며 의아해했지만, 라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국가의 모든 일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라더는 국가의 눈이라는 직책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어째서 보아야하는지, 왜 그것을 보아야하는지. 왜 보고도 못 본 척 해야하며, 왜 보지 못하고도 보았다고 해야하는지.

*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 부작용을 불렀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 끝에 어두운 것이 지속적으로 침범해들어왔다. 마지막 기억은, 그렇지. 명령이 있었다. 의심이 퍼지는 상황에서 여론은 쉽게 국가를 흔들었고, 흔들린 국가는 희생양을 찾았다. 뜰리오트로프의 공직자로서 지켜야할 규칙을 어기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며, 국위선양의 가능성이 있는 선수를 잡아넣어 여론을 흔든, 감시자 잠뜰을 불러 처벌을 내렸다.  C등급 수용소의 문을 열었고, 잠뜰이 테이블 아래에 숨긴 손을 꺼내더니, …….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했다. 그는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금방이라도 그 규칙 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뜰리오트로프의 규칙을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텐데도 그랬다. 권력과 물질을 보고 행한다 생각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고, 무언가 더 많은 것을 바란다고 하기에도, 어딘가 이상했다. 잠뜰은 감시자였지만 규칙에서 한없이 벗어난 존재였다. 꼭,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처럼…. 라더는 생각 사이사이를 억지로 이어붙였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는데 경보 소리가 너무나 먼 곳에서 들렸다.

그제서야 작은 의심이 불씨처럼 피어올랐다. 왜 국가는 잠뜰의 수상한 영상 폐기 기록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는가. 왜 국가는, 여론이라는 것을 내버려두다가 의심이 퍼지고 물결 위로 불꽃이 드리우기 시작한 이런 때에야 그것을 잠재우려고 움직이기 시작하는가.

정말, 라더는 정직했기에 그 자리를 지킨 걸까?

생각이 뚝 끊겼다. 라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보았자 의미 없다. 국가의 일은, 자유에 뒤따르는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이유가 있을테고 그 이유를 어떻게 한낱 국민이 알 수 있겠는가. 책임 없는 자유가 주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는 자들은 국가가 설립되던 날 규칙을 제정한 이들이며, 규칙 아래에서 책임을 동반한 자유를 누린 라더와 국민들은 아마, 평생을 모를 일이다.

뜰리오트로프라는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규칙이 있다. 라더는 끝까지 그것을 지켰다. 뜰리오트로프의 빛나는 공직자로서.

1. 절대로 국가의 규칙과 작동 원리를 의심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