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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9)

9. 물보라(2)

우재가 천천히, 제가 내린 차를 중심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차를 탔는지 뻐근함에 못 이겨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수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다. 단순한 거래 현장에 어째서 수장인 우재가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잠뜰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각별은?

"…레쏘."

지리멸렬하게 얽혀 책임소재를 찾던 신경이 단 한명에게 몰렸다. 레쏘. 거래에 대한 정보를 주고 아니마를 처리해달라 부탁한 사람.
레쏘. 그는 분명 알았을텐데. 단순히 거래를 탈취하여 선전포고를 날리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그는 분명 알았을텐데.

"… 레쏘가 우릴 속였어."

*

"…그래, 여차하면 직접 개입해서 처리해."

각별이 먼저 무전을 끊었다. 뻐근하게 두통이 밀려왔다. 일이 꼬였다. 만약을 대비해 이신을 보낸 건 옳은 선택이었다. 관자놀이를 꾹 짓누르며 뒤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잠뜰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대화를 다 들었을텐데.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각별은 머리를 굴리는 대신 직설적으로 두드리길 택했다.

"어떻게 생각해야하죠?"
"뭘요?"
"그쪽도 속았다고 생각해줄지, 그쪽이 속였다고 생각해줄지 물어보는 겁니다."

잠뜰이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니나 다를까, 잠뜰은 한 조직의 윗자리에 있기에는 처세가 부족하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던 어중간한 삶을 살아왔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각별이 책상을 쾅,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잠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가 빤히 각별을 응시했다. 손바닥에서부터 붉은 빛의 통증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각별이 말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대답해.

"내가 왜요. 까먹었나본데 거기 우리 애도 갔어."
"그 녀석도 알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
"내가 뭐 얻을 게 있다고?"

그건 이제 알아내야지. 각별이 굳게 닫힌 문 너머를 곁눈질했다. 공룡과 라더가 밖에 있었다. 먼저 부르는 쪽이 승기를 잡는다. 다만 우습게도, 아무도 먼저 행동하지 않았다. 잠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숙인 각별과 눈높이가 맞았다.

"속였다면 레쏘가 우리 모두를 속인 거지."

검은 눈동자가 노란 빛을 받아 빛났다. 각별은 그 눈을 싫어했다. 정말 싫어했다. 당장에 총알을 박아넣고 싶을 정도로. 달빛에 빛나던 검은 눈동자에 색이 도는 순간은 언제나 악몽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각별은 제 이마에 뜨거운 열감을 느꼈다. 이미 몇 발의 총알을 뱉어낸 참인 아가리가 미간에 처박혔다. 발끝이 향한 곳이, 시야를 돌리는 모든 곳이 온통 붉었다. 도련님,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걸 원망하세요. 검은 눈동자가 반으로 접혔다.
각별의 손에도 총이 들려있었으나 아무 쓸모 없는 쇳덩이에 불과했다. 손에 화상이 남도록 연습하고 배웠던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 없이 스러지기 직전이었다. 각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방아쇠가 천천히 움직였다. 총성이 울렸다. 통증은 없었다. 각별은 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눈을 천천히 떴다. 피가 잔뜩 묻은 방 벽과 만신창이로 엎어진 사체들이 들어왔다. 지옥 치고는 현실감이 높은 풍경이었다. 뺨에 들러붙은 축축한 것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각별님. 티티가 갓 총알을 발사한 총을 들고 달려들어왔다. 창밖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티티가 작은 손으로 작은 몸을 급하게 끌어안고 다친 곳을 살폈다. 싸늘하게 식은 감각이 되살아나자 도리어 모든 게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잠뜰이 책상을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 낮은 눈높이지만, 잠뜰은 분명 각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별이 철제 책상의 표면을 닳아빠진 손톱으로 까득 긁어내렸다. 먼저 시선을 피하면 목이 베인다. 날카로운 초겨울 공기가 폐부로 스몄다. 조금 불쾌하네요. 잠뜰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쪽을 믿고 먼저 정보를 제공해줬는데."

잠뜰이 태연하게 눈썹을 기울였다.

"상의 하나 없이 이신을 보냈다는 건 처음부터 우리를 믿지 못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

덕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레쏘가 우릴 속였어. 너무 급작스러운 자극에 반응할 일말의 여유조차 잃은 것에 가까웠다. 겨우 정리했던 뇌 속이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우재가 움직였다. 운전석에서 내린 별종에게 손짓을 하고, 푸른 하늘을 한없이 올려다보았다. 수현이 덕개의 등에 손을 올렸다. 어떻게 하죠? 덕개는 얽히고 뭉그러진 실타래 어드메에 상황을 타개할 코 하나 쯤은 남아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걸고 눈을 질끈 감았다. 회의 시간에 들었던 아니마에 대한 정보들, 잠뜰이 귀띔해준 피에니타에 대한 일부 사실들, 차를 타고 가며 잠뜰이 해준 말들. 모든 게 주마등 마냥 눈 앞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서 원래 계획대로 거래에 나온 인원 전부를 처리하면, 우재를 처리하면, 걷잡을 수 없이 전쟁이 시작된다. 우재가 제 뒤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숨겨놓았을 지 알 수 없어 조심스러웠다. 걸핏하면 균형을 맞추려고 시작한 일이 도리어 균형을 어그러뜨리는 일이 되고 만다.

별안간 어느 시점에서 생각이 멈췄다. 언젠가 잠뜰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덕개에게 직접 했던 말은 아니었다. 그저 운 좋게 주워듣고 뇌 한쪽 구석으로 흘려두었던 그 말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라더야, 이 밑바닥은 썩었어. 질서래봤자 층 나뉜 구정물일 뿐이야. 절대 맑아질 수 없는 구정물. 덕개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상황에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하는 기억이었다. 어그러진 이유라면 알 수 있겠지만, 타개할 방법은 되어주지 못했다. 옆에서 수현이 덕개의 어깨를 약하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아직 저쪽은 몰라."

먼저 치면 돼. 우재를 처리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겠지만. 수현이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붙잡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재가 컨테이너 하나를 탕, 주먹으로 쳤다. 소리를 낼 뻔 해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우재가 컨테이너를 한번 더 쳤다. 고양이 별종이 총을 겨눈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수현이 귀를 기울였다. 쾅쾅 거리는 소리와 발소리, 바다의 파도소리가 한꺼번에 큰 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덕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으나, 심장이 터질듯 뛰는 건 좀체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 귀에도 이렇게 예민하게 들리는 데, 더 예민한 토끼 별종의 귀에는 북소리보다 크게 들리겠지. 그렇다고 심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니 숨만 죽였다.

쾅, 이번엔 발이었다. 컨테이너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함께 났다. 수현이 과한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찡하게 잔음이 남아 머리가 울렸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재가 고함을 질렀다.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당장 나와!"

탕. 총성이 고함의 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안주머니에 꽂은 손이 어중간하게 멈췄다. 수현이 놀라 헉, 하고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발소리가 들렸다. 탕, 다시 한 번 들렸다. 누군가가 흙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우재가 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총성의 주인은 우재가 아니다. 이 곳에, 한 사람이 더 있다.

*

수현은 언젠가의 비겁함을 상기했다.

총성과 함께 닫혀버린 문 안쪽에 남겨진 친구를 부르면서도, 그 역방향으로 이끌려갔던 제 발과 멀어질 수록 느껴진 소름끼치는 안도감을 상기했다. 어두운 골목에 몸을 숨기고, 늘어선 붉고 푸른 불빛을 보면서, 한없이 친구의 이름을 읊조리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던 발을. 그 자리에 존재했던 제 3자로 추정되는 구둣발 소리가 급하게 무언가를 끌고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그 자를 쫓는 수많은 발걸음들을.

갑자기 왜 먼 옛날의 일이 머리를 스쳤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수현은 그 날의 소름끼치는 안도감이 다시 제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적어도 저는 안전하리라는, 제 3자의 개입이 제게 안전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역겨운 안도감.

수현은 덕개의 팔을 붙잡았다. 덕개가 다시 안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빈 손을 보였다.

"… 일단 가만히 있어보죠."

컨테이너 위를 고의적으로 소리내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우재가 총을 꺼냈는지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총성이 울려퍼졌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우리의 편이다. 수현의 입가에 비릿하게 미소가 번졌다. 그를 알 리 없는 덕개가 저지를 뿌리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순간 그들의 눈 앞에 그림자가 떨어졌다. 속도감 있는 추락 치고는 소리가 작았다.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푸르고 긴 자켓이 하늘거렸다. 푸른 머리카락 몇 가닥이 뒤늦게 내려앉았다. 이신. 수현은 그를 확인하고는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득이하게 저를 보내며 각별이 마련한 안전장치였다. 신임 받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빠지기에는, 그 역시 충성하지 않았으므로 적절하지 않았다. 이신이 덕개와 수현을 확인하고는 옆 컨테이너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우재가 총을 겨누었지만, 허공을 찢을 뿐이었다. 덕개는 상황을 파악하기에 바빴고, 수현은 컨테이너 뒤에서 숨을 적당히 정리하는 이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신이 수현을 바라보았다.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수현에게는 분명 들렸다.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이신이 주머니에 대충 쑤셔두었던 총을 꺼내 탄창을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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