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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7)

7. 목줄


발 딛고 선 곳이 나락은 아니리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햇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비를 맞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늘진 곳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사는 이들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던 때가 있었다. 발로 짓밟히면서도 으깨지지 않음에 감사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차악의 삶에 감사하며, 감히 위로 고개를 치켜들지 않으며. 밑바닥 인생들이 늘 그러는 것처럼 간혹 삶을 위한 죄를 저지르며 그렇게 살았다. 덕개는 그 삶에 만족했다. 더 위로 갈 수 없으니 더 밑으로 꺼지지만 말자고. 야윈 손을 붙잡고 매일 아침 응답 없는 신을 향해 기도했다. 신은 덕개에게 그저 최소한의 안전망 같은 존재였다.

덕개는 살기 위해 움직였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 살아가기 위해 일했고, 하루 살아가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 물건을 훔쳤다. 덕개는 간혹 술이 들어가면 또니에게 하소연 했다. 살아가기 위해 했던 짓들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

턱을 괴고 있던 손이 비뚜름하게 천천히 내려갔다. 덕개가 소매를 더 꽉 쥐었다.
이유 모를 긴장감이 흘렀다. 잠뜰에게 있어 덕개는 그다지 경계할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그게 만만하게 볼 대상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기에 더욱 예의주시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손짓 하나가 모든 걸 허물 수도 있다는 걸 잠뜰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모든 것을 뒤엎는 악동의 위치에 있던 건 잠뜰이었다. 이렇게 역으로 판을 지켜내는 어른의 위치에 있게 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그런 악동 중의 하나였다.

"… 제가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알고 싶어요. 왜 그런 일에 저를 보내시기로 하셨는지, 왜 이제까지 제게 어려운 일들을 맡기셨는지."

덕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잠뜰의 입은 오히려 다물렸다. 그러게, 왜일까. 왜 라더를 시켜도 되는 일에 극구 덕개를 부르고, 또니를 부르고. 필립을 믿지 못하면서도 곁에 두고. 내려왔던 비합리적인 선택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라더 혼자였다면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을 일에 덕개와 또니를 보냈다. 일은 잘 처리했지만,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낳았다. 차라리 절 죽이세요. 필립이 울며 애원했다. 잠뜰은 필립의 어깨를 붙잡고 그럴 수는 없다며 가증스럽게도 끌어안았다. 그 모든, 보스라는 직책 하에, 잠뜰이라는 인물의 인격 하에 어떤 의문도 갖지 않은 채 묻혔던 선택들이 덕개의 질문 하나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었던 덕개를 살렸느냐부터, 지금까지.

"…네가 이 일에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처음 봤을 때부터."

*

"걱정 안돼?"
"뭐가."
"수현이랑 그 초짜 같이 보내는 거 말이야.
이신이 부르길래 몰래 거기 보내려는 줄 알았는데."
"걔 눈 못 봤냐."

눈? 잘 안 보이던데. 공룡이 늘상 그렇듯 장난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리며 제 눈가를 쓸었다.
각별은 입에 대고 있던 하얀 머그잔을 무심하게 책상 위에 올렸다. 덕개라고 했던가. 긴장한 티가 역력하던 강아지 별종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궐련향이 씁쓸하게 입 안을 헤집었다. 뒤이어 노트에 계획들을 일일히 적어내려가며 바쁘게 움직이던 귀가 그려졌다. 뒤이어 눈, 잠뜰과 각별을 바라보던 눈이 그려졌다. 형언할 수 없는 색깔의 눈동자가 그 순간 붉게 빛났었다. 각별은 그 눈을 보고 초짜라는 호칭을 완전히 접어두기로 했다. 잠뜰은 분명, 그 눈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 보란듯이 목줄을 채워두고 끈을 놓아두었다. 각별은 당연히 그것을 도발로 받아들였다.

"하룻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사냥개였어."

잠뜰이 덕개의 어깨에 자랑스럽게 손을 올렸다. 각별이 불을 갓 붙인 궐련을 입에 물었다. 덕개는 희끄무레한 연기 사이에 끼어 애꿎은 제 소매만 문질러댔다.
각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실력이 보장된 필립이 아니고 이 초짜를 보내기로 했느냐고. 피에니타 측에서 미리 점찍어두었던 별종은 필립이었다. 조직에 들어온 지 5년도 채 안 되어보이는 덕개가 아니. 아니마의 규모도, 협력 관계도 완벽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손을 쓰는 것도 만만치 않은 리스크를 각오한 일인데, 더 큰 위험부담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잠뜰은 태연하게 웃었다. 믿고 맡겨보라고. 그리 말하는 잠뜰의 손길을 받던 덕개의 눈이 그렇게 빛났다. 주제에 자존심을 세운다고 착각했으나, 곧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각별이 헛웃음을 뱉으며 궐련을 창틀에 문질러 껐다. 잠뜰이 덕개를 계단실에서 내보냈다. 둘만 남아 묘한 정적이 흘렀다. 나눌만한 이야기는 회의실에서 끝마친 참이었고, 사적인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각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굳이 따로 불러서까지."
"기왕 함께 하기로 한 거, 믿음을 좀 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잠뜰이 입꼬리를 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각별에게 똑바로 꽂혀들었다.
각별은 저 눈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눈 앞에서 각별은 한낱 열여덟 살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제멋대로 씌워진 왕관을 붙잡고 그림자 속에서 빛을 향해 부질없이 눈을 돌리는, 아무 힘도 없는 열여덟 살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의 목줄을 따버리려 하는 열일곱 소녀 하나. 그때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기억은 언제나 뇌 한 구석에 평생 박혀있을 것처럼 굴었다. 잠뜰의 눈을 마주하면 언제든 도로 꺼내져 눈 앞에 늘어뜨려지곤 했다. 다행이도 각별은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안 보이는 척 숨기는 것에 아주 능숙했다. 잠뜰은 그 이후로 기억할 가치 없는 별 실없는 소리들을 잔뜩 늘어놓다가, 슬슬 다시 이야기나 하자며 먼저 계단실 문을 열었다. 자욱하던 연기가 순식간에 함께 빠져나갔다. 안 가요? 잠뜰이 웃으며 눈꼬리가 접히고 그 비릿한 눈동자가 눈무덤 사이로 숨자, 각별은 덕개의 눈을 보고 느꼈던 기이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


잠뜰이 덕개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였다. 내일 일찍 나가야하잖아. 대답이 됐으면 어서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더 자.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더 할 말이 있었지만, 따라 웃어 묻어버렸다.
잠뜰에게 답을 구해보았자 엉킨 것을 더 엉키게만 할 뿐이었다. 덕개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깨를 토닥이던 손이 내려가고 잠뜰이 다시 제 자리로 천천히 돌아갔다. 야경을 배경 삼은 잠뜰의 뒷모습은 가히 뒷세계의 황제로 불릴만 했다. 발레나의 명맥이 많이 끊겼고, 그걸 끊은 장본인이 잠뜰이기는 하나,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덕개는 처음 잠뜰을 보았을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물건이네. 어디서 보냈어?
총구를 들이밀고 그렇게 질문을 해댔다. 죄송하단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그냥 평소처럼 길거리에 버려져있던 트럭에 손을 댔을 뿐인데. 경찰에게 죽도록 맞을 각오는 충분히 했다. 멍과 피딱지를 어머니께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길고 두꺼운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좋은 하루치 일자리를 구했어. 너스레를 떨 준비도 만반이었다. 이렇게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덕개는 밑바닥에 살았지만 근본은 양지의 사람이었다. 조직이니 뭐니, 간혹 신문에 실리는 이름 모를 시체 소식과 의원들의 포부 좋은 근절 계획으로만 접해왔던 세계였다. 평생 섞일 일 없는 세계였다. 또니가 덕개의 뒷목을 거칠게 붙잡고는 잠뜰의 발 앞으로 떠밀었다. 잠뜰이 잠금장치를 천천히 푸는 소리가 났다. 딸깍. 지옥같은 정적이 지나갔다.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슬쩍 떴다.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아떨어졌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눈동자는 곧았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있었다. 곧 총을 내렸다. 너, 여기 있을 거야? 작게 물어왔다. 순간 뭘 뜻하는 지도 모르고 고개를 저었다. 잠뜰이 이어 물었다. 우리랑 갈래?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또니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굳게 붙잡고 있던 옷깃을 거칠게 놓았다. 잘 부탁한다. 신입.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그대로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로만 듣던 뒷세계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는 것을 알았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덕개는 붉은 웅덩이 위에 꽤나 안정적으로 서 있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

썩어들어가다 못해 구멍이 나 버린 세상이지만, 언제나 밤은 아름다웠다. 빛나지 못하는 밑바닥을 우롱하듯 날이 갈 수록 더 환하게 빛나는 고층 건물들과, 그 사이에 섞여들어간 더 밑바닥의 그림자들. 그 사이에서 굳이 수현의 위치를 찾는다면 그림자였다. 위에 올라있지만 아래와 연결되어 있는, 빛나지 못하는 존재. 떳떳하게 낮을 누릴 수 없는 존재. 어쩌면 진작에 쫓겨난 신세였을, 그런 존재. 밑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배기음에 하얀 귀가 펄럭였다. 서늘한 창틀에 숨을 불자 빛들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곧 겨울인가. 이번 해의 추위는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눈을 깜빡이니 꽃이 졌고 잠시 뒤를 돌아보니 낙엽이 바닥에 흩뿌려져있었다. 곧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겠네. 기왕이면 오늘 내려줬으면 좋겠는데. 괜스레 제 입김이 만든 막에 손끝을 올려 쓸어내렸다.

"집에 안 가?"

공룡의 경박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잠 모자라서 실수하면 안되잖아. 농담조의 격려도 섞였다. 수현은 창틀을 놓고 몸을 틀었다. 어두운 방 끝 유일한 광원인 문 밖, 그 틈새에 공룡이 그림자를 끌고 서 있었다.

"못 일어날까봐 불안하면 내가 깨워줘?"
"너 아침에 잘 못 일어나잖아."
"알람 10개는 맞춰두지 뭐."
"그거 듣고 내가 먼저 깨겠다."

공룡이 머쓱하게 웃으며 하품을 했다. 전염되었는지 수현도 하품을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수현은 항구에 서 있게 되었다. 어울리지 않는 검은 양복과 검은 가방을 들고, 어울리지 않는 가증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수현은 내심, 내일이 오지 않길 빌었다. 하루하루 지나갈 수록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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