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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5)

 5. 불편한 자리(2)

 

검은색 철제 책상 위에 여러 종류의 종이들이 어지럽게 놓였다. 레쏘의 사진, 거래 장소의 지도, 몰래 찍은 것으로 보이는, 우재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 아니마의 뒷모습. 카메라의 존재를 인식한 것인지, 곁눈질로 쏘아보는 붉은 눈동자가 매서웠다.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카메라 뒤에서 계책을 짜는 이들을 농락하듯이. 알 수 없이 부아가 치밀었다. 얕보이고 있다. 이깟 별종에게, 철저히 얕보이고 있다. 각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해서, 항구에서 곧 거래가 진행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잠뜰이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각별은 간간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뜰의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별종 간부진 둘이 아니마의 조직원으로 위장하여 거래 현장을 가로채고, 훼방을 놓는다. 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난다면 더더욱 좋다. 거래 현장에서 깽판을 놓는 것도 모자라 거래처 측을 죽이기까지 한다면 아니마의 신용은 땅에 떨어진다. 이 판에서 신용은 목숨이었다. 목숨줄을 차근차근 지르밟아드리겠다는 의지가 서려있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위장한 조직원이 사망하면 흔적이 남아버리므로, 생존 확률이 높은 간부진이 필요하다. 각별은 맞은편 구석에 앉은 개 별종에게 눈길을 주었다. 덕개라고 했던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손끝을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검붉은 딱지가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었다. 간부 자리에 어떻게 올라왔는지도 알 수 없는, 초짜다. 그건 피에니타 측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은 한번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다. 조금이라도 유혈사태가 일어날 위험이 있으면 공룡이 나섰다. 이런 부분은 예상하지 못했나보군.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폈다.

"그래서, 중요한 걸 듣지 못했는데. 왜 우리여야 하는지. 보다시피 우리에게 별종이라곤 이 토끼 하나 뿐인데요."
"아니마가 가만 있지 않을테니까요."

잠뜰이 특유의 도발적인 말투로 답했다.
아니마의 이례적으로 도발적인 행보를 생각했을 때, 분명 전쟁을 일으킬 거다. 발레나와 피에니타 둘 중 한 쪽이 먼저 먹힌다면 남은 쪽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하다. 아니마는 태양을 넘보고 있다. 각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측하기 어려운 아니마를 완전히, 미리 짓눌러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니마의 현재 세력이 얼마나 크고, 믿는 구석이 얼마나 단단한 지는 알 수 없지만 내로라하는 영향력을 가진 두 조직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을테니. 책상 위를 날카롭게 딱딱거리던 펜이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잠뜰의 검은 눈동자가 각별을 향했다. 각별이 입을 열었다. 그가 선언할 차례였다.

"일이 어그러진다면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


답답함에 열이 오른 이마를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문질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카롭게 견제하던 대상의 본진에서 태연히 있을 수 있는 건 잠뜰 뿐이었다. 긴장 때문에 뒤늦게 머리가 어질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라더의 등을 한번씩 찌르고 지나갔다. 가던 길이나 얌전히 가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이 곳이 적진임을 상기시켰다. 괜한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다. 적당히 머리를 식힌 뒤 고개를 들었다. 복도 끝에 시계가 있었다. 언제 다시 시작한다고 했더라….

"라더야."


시야 끝에 걸친 하얀 귀가 쫑긋거렸다. 수현의 주홍색 눈동자가 여느 때와 같이 곱게 접혔다. 너는 웃는게 이렇게 순해서 의심 피하기엔 딱이다. 공룡이 자주 놀렸던 그 눈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너는 왜 변하지 않았지? 라더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마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저 눈은 평생 저 모양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이 오른손에 든 종이컵을 내밀었다. 갓 뽑아와 김을 내는 커피가 묵직하게 찰랑였다. 고민할 새도 없이 컵을 잡았다.

"왜?"
"그냥. 오랜만이잖아."


수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서로를 직접적으로 향 말은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잘 지냈느냐는 안부가 다였고, 평화롭게 그런 안부를 나누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들은 처음 회의실 안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반갑게 입을 열었어야했다. 안부를 나누려거든 그랬어야 했다.

수현이 제 몫의 커피를 홀짝였다. 마시지도 못하고 쥐고만 있으니 손바닥이 빨갛게 아팠다. 수현의 목넘김 소리는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깨기 위한 노력이었다. 간극을 어떻게든 좁혀보려는 노력이었다.
라더는 침묵했다. 손 안의 커피가 빠르게 식어갔다. 수현이 다시 웃었다. 뭐해. 다 식겠다. 검은 파동을 응시했다. 컵을 기울였다.

"수현아."

컵이 입술에 닿으려는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공룡이 서류철을 쥐고 걸어왔다. 특유의 껄렁한 발걸음은 대리석 바닥 위에서 더 큰 소음을 냈다. 들어가자. 공룡이 수현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수현이 머뭇거렸다. 라더는 컵을 내렸다. 공룡이 라더를 응시했다. 여전한 눈이 다른 온도로 붉은 색을 눈에 담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풀려가던 공기가 도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유를 묻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공룡은 라더를 원망했고 라더도 공룡을 원망했다. 이유도 모르고 그랬다. 그렇게 평생 시궁창에 처박혀 살아.
결국 모두가 시궁창 더 밑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숨쉬는 꼴이 되었다. 라더에게도, 공룡에게도 피가 묻었다. 어쩌면, 이제 곧 수현에게도.

"
잘 살아보겠다고 하지 않았어?"

라더의 입에서 날선 말이 튀어나왔다. 공룡이 고개를 틀었다.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던 게 이런 거였냐고. 한번 터져나온 회한이 줄줄이 쏟아져나왔다. 공룡이 말하던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라더에게 찾아왔을 때엔 이런 모양새는 아니었다. 각자 붉은 꼬리표를 달고 허덕이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공룡이 그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공룡은 답할 수 없었다. 그걸 라더는 잘 알았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이 얽힌 끈의 책임을 물어야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 속 응어리 진 무언가가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꼬아놓은 주체는 수 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수현이 라더와 공룡 사이를 갈라놓았다. 왜 그래. 여기 싸우려고 온 거 아니잖아.
하얀 귀가 긴장된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듯 흔들거렸다. 공룡이 수현의 팔을 붙잡아 치웠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표정을 하면서도 놀랍도록 차분한 숨을 쉬었다. 라더는 본능적으로 공룡이 책임을 물으리라는 걸 알았다. 제대로 풀어내지도 못한 채 폭탄만 서로에게 돌리고 있는 꼴이었다. 폭탄 심지가 스파크를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수현이 다시 공룡을 붙잡았다. 공룡의 입이 열리고 뾰족한 송곳니가 형형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그 이 보다 더 뾰족한 말이 튀어나올 차례였다. 이게 다-

"그만해."

엉겨붙은 공룡과 수현의 뒤로
구두 소리가 들렸다. 라더의 시선이 빠르게 익숙한 소리를 쫓았다. 갈색 머리칼이 구두 소리에 맞추어 좌우로 흔들렸다. 그 더 뒤로 각별이 있었다. 날카로운 노란 눈과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각별의 눈빛으로 보아 시시콜콜하고 유쾌한 잡담 정도의 무게는 아니었으리라. 구두 소리가 순식간에 공룡과 수현의 옆을 스쳐갔다. 라더의 어깨에 가볍게 손이 내려앉았다.

"쉬는 시간 끝이야. 마저 이야기할 게 남았잖아?"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치고는 라더를 스쳐갔다.
어렴풋이 잔향이 남았다. 궐련 향. 잠뜰은 궐련을 물지 않았지만 자주 태우긴 했다. 냄새가 나잖아. 그렇게 말했다. 궐련향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각별이 뒤이어 라더의 옆을 스쳤다. 더욱 진한 궐련 향이 그 자리에 남았다. 수현이 공룡을 천천히 놓았다. 이미 라더의 시선 밖이었다. 공룡이 먼저 발을 떼었다. 미처 치워지지 못한 수현의 손과 라더의 어깨를 차례로 통과해 지나갔다. 수현은 공룡의 등과 라더의 눈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라더의 눈을 바라보며 공룡의 뒤를 쫓았다. 라더 혼자 남아있었다. 회의실로 돌아가야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기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궐련 향이 흐릿해지자 그 사이를 혈향이 침범했다. 비릿한 맛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

쾅,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사람이 빠진 회의실 벽으로 어떤 완충제도 없이 날아들어 튕겨나왔다. 왜 그렇게 빡쳤어? 공룡이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자기는. 각별이 격양된 호흡과 상반되는 덤덤한 말투로 대꾸했다.
손톱이 까드득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책상을 긁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래?"

보다못한 공룡이 각별의 주의를 돌렸다. 각별은 고개를 들었지만 공룡을 보지 않았다. 그저 잠뜰의 흔적이 남은 검은 벽과 화이트보드, 그 위에 어지러이 널린 종이들을 응시했다. 붉은 선과 파란 선이 그 위를 자유롭게 놀았다.
각별의 구역 안에서 놀았다. 그 당돌함은 그날 겨울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권력을 얻은 만큼 더 했다. 각별은 저도 모르게 흐트러진 넥타이를 꽉 조였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한없이 기어오른다. 언젠가 다시 목에 칼을 겨누리라. 그 당돌한 검은 눈이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리라. 그 전에 싹을 잘라야한다. 각별이 공룡을 바라보았다. 공룡은 평소와 같이 서글하니 장난기 서린 얼굴로 웃다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각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신이 좀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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