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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3)

3. 피에니타

 

"발레나 측에서?"

책상 위를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발레나 측에서. 각별이 책상 한쪽으로 밀어둔 서류뭉치 맨 위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냈다. 난잡하지만 확실하게 빨간 선이 그려진 항구 지도와, 아니마의 수장 우재의 사진. 공룡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물품을 약속한 만큼 받지 못해 따지러가면 언제나 그 이름이 나왔다. 아니마. 우재. 갑작스럽게 뭍으로 올라온 조직과 그 수장.
겁도 없이 야금야금 영역을 침범하는 하이에나 같은 것들.

"레쏘가 발레나 측에 먼저 정보를 넘기면서 부탁했던 모양이야. 아니마를 정리해달라고."
"레쏘가 왜? 그 사람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며."
"레쏘의 눈에도 아니마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는 게 보인 거겠지. 조직 간의 균형을 신나게 망가뜨리고 있잖아. 이대로 세력이 더 커지면 전쟁은 불가피해져."

각별이 다리를 쭉 뻗어 꼬았다. 공룡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직 간의 정보거래소로 이용되는 바의 사장이 한 조직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다른 조직에 정보를 흘렸다. 이 사실이 지하도를 타고 흘러가면 바 시뮬의 신용은 크게 깎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발레나 측에 정보를 넘겼다는 건…. 뭔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책상 모서리를 손끝으로 톡, 톡 정신사납게 두드렸다. 각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전히 믿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나, 발레나는 믿기로 결정했고 먼저 정보를 제공해주며 공조를 요청했다. 선택해야했다. 당장의 안위냐, 이후의 평온이냐.

"… 며칠 뒤에 회합을 한번 갖자고 연락이 왔어."
"간부진들 전부 모여?"
"아니. 딱 셋만 데려오라고 하던데. 거래현장에 나갈 한 명은 꼭 넣어서."

"저쪽 라인업은 대충 나오네. 우리는 누구 데리고 갈건데? 티티?"
"수현이가 갈 거야."

각별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상 밖의 이름에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걔를 왜? 아니마는 별종들 뿐이잖아. 우리 조직에서 별종은 수현이 뿐이고. 각별이 덤덤하게 서류들을 도로 정리했다. 티티나 이신은 그런 임무엔 안 맞아. 작게 덧붙이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문제를 일으킬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순수하게 걱정이 되었다. 수현은 이런 생활과 맞지 않는다. 이제까지는 단순 거래 업무만 맡기고 직접 현장에 뛰어드는 일은 공룡의 선에서 처리해왔다. 각별도 그걸 알았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괜히 현장에 내보냈다가 책 잡힐 일은 하는 것 보다는 훨배 나았으니. 하지만 이번 일은 공룡이 처리할 수 없었다. 수현도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었다. 언젠가 청산해야하는 관계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준비할 시간도 없이. 공룡은 쓰게 웃으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뭐라 의견을 제시하긴 힘들다. 수현을 제외하면 피에니타 내에서 아니마 행세를 할 사람은 없다. 공룡이나 이신이 별종인 척 동물 신체를 붙이고 나타나도 별종 조직을 주 거래 대상으로 삼은 쪽에서 그걸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악수가 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했다.

"… 수현이가 잘 할 수 있을까? 그냥 거래 정도면 괜찮아. 그런데…."
"뭘 걱정하는 지는 알지만 수가 없어. 최대한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야지."

각별이 교과서적인 답을 내렸다. 공룡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각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봐. 다른 간부진들에겐 따로 연락을 할테니. 공룡은 괜스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복도로 나갔다.

*

눈을 감으니 뚫어져라 보고 있던 전등의 잔상이 어둠 속을 유영했다.
복도 저쪽 끝, 각별의 사무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적당히 익숙하고 경박한 걸 보아하니 공룡이다. 이제야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다. 곧 연락이 오겠네. 각별은 중요한 사항이 있을 때 우선적으로 공룡을 먼저 불러 회의를 했다. 속도 없지. 제 목 따려다 망한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믿고 제 곁에 두는지. 처음 공룡의 뒤에 숨어 피에니타에 왔을 때 티티와 이신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저런 애송이들을, 뭘 믿고?

공룡과 수현이 피에니타에
, 이 진흙탕에 발을 담그게 된 건 8년 전이었다. 아직도 그 순간 몸 전체를 싸고 돌았던 긴장감이 간간히 심장을 두드렸다. 공룡의 이마 위에 붉은 화상을 낙인처럼 누른 총구와, 사람이 아닌 것을 보는 것처럼 매섭게 굳어있던 각별의 노란 눈동자.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벽 뒤에 숨어 지켜보고 있던 수현 자신. 터질 듯 귓가에서 울려대는 심장소리 때문에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나, 공룡이 입을 열자 각별이 웃으며 총구를 거두었다. 심장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자 공룡의 목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친구가 있어. 그 녀석도 같이 데려가지 않으면 나도 안 가.

"여기서 뭐하냐?"

천천히 들어올린 눈꺼풀 틈으로 공룡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람 좀 쐬려고. 웃으며 허리를 바르게 폈다.
바람을 쐬려거든 옥상이나 올라가지. 공룡이 옆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뒤늦게 피로가 몰려오는지 거의 눕듯 벽에 기댔다. 저 꽉 닫힌 문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곧 각별이 공지해줄 건 알았지만 궁금했다. 제 안위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런 문제라면 차라리 공룡이 먼저 말해줬으면 했다. 알면서 당하는 것과 모르는 채 마음을 졸이는 건 무게가 다르니까.

언젠가 팽 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늘 해왔다. 티티처럼 머리가 좋은 것도, 이신처럼 싸움에 특출난 것도 아니다. 공룡처럼 부족함을 가릴 깡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수현은 어중간했다. 길거리에서 자라며 부득이하게 배운 개싸움과, 별종인 덕에 운 좋게 얻은 몇가지. 그게 다였다. 입을 잘 놀리긴 했지만 그건 민간인을 상대로 할 때 빛을 발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입 옆에 구멍이 하나 더 생기는 게 이 바닥이었다.
공룡의 뒤를 따라와 얻은 간부라는 자리는 수현에게 과분했다. 애초에 각별이 왜 자신을 공룡 말만 듣고 간부 자리에 올려놓은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공룡과 자신이 피에니타에 소속된 것만 해도 상식에서 한참은 벗어나버린 일이었다. 연속되는 비상식의 사이에 서 있었다. 길을 잃었다. 애초에 길거리에 발을 딛은 순간부터 길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너 곧 총 들어야겠더라."

공룡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가 수현의 뒷덜미를 잡아 채 늪에서 끌어올렸다.
보통 같으면 공룡이 대신 나섰을텐데. 그러지 못했는지 표정이 안 좋았다. 자세한 건 보스가 말해주겠지만. 공룡이 인상을 쓴 채 운을 떼었다. 아니마의 거래 현장에 먼저 가서 물품을 빼돌릴 거다. 피에니타의 간부진 중 별종은 너 뿐이니까 네가 가야만 한다더라. 발레나 측과 공조하게 될 거다. 각별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적당히 요약해서 쏟아냈다. 수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괜찮겠어?"
"그냥 아니마인 척만 잘 하면 되는 거잖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저쪽도 최대한 물리적 충돌은 피하는 방향으로 가길 바랄 거야. … 아니마 녀석들이 별종만 아니었어도 내가 갔을텐데."
"괜찮아. 언제까지나 네 뒤에 숨을 수는 없잖아."

잠시 적막이 흘렀다. 수현은 걱정 말라는 듯 밝게 웃었다. 맞추고 있던 주홍빛 눈동자가 눈꺼풀 안으로 사라지자 공룡도 같이 눈을 감으며 웃었다.
마음 한쪽을 빼곡히 채운 불편한 감정을 억지로 눌러담아 감추었다. 밀도가 커진 감정이 척추를 짓눌렀다. 서로에게 너무도 큰 부채감을 지고 있었다. 지금은 곁에 없는 한 친구의 몫까지 꾸역꾸역 끌어안고 있었다. 며칠 뒤에 회합이 있을 거래. 너도 갈 거야. 공룡이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일어났다. 수현은 잠시 벽에 뒤통수를 박고 천장을 응시했다.

"괜찮겠어?"
"뭐가?"
"라더."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던 이름이 튀어나와 공기를 갈라놓았다. 공룡의 발이 멈췄다.
뾰족한 송곳니가 입술 가장자리를 진득하게 씹었다. 뒤쪽에서 표정을 정리하고 웃어보였다. 괜찮아. 자주 마주치긴 했거든.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지만. 괜찮아. 걔도 신경 안 쓸 걸. 호칭에서 깊게 묻어놓았을 뿐 차마 지우지 못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어린 날의 치기와 그나마 순수했을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릿하게 흘러나왔다. 이를 갈며 바라보았던 붉은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그렇게 붉었을까. 피 보다 더 붉게 빛나던 눈동자 안에 뭐가 그렇게 많이 담겨있었을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수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어보였다. 어디까지나 일 때문에 마주치는 거니까. 사적인 감정은 접어두는 게 좋다. 과거에 얽매여 멱살을 쥐었다간 살아남기 힘든 곳이니까.

공룡은 다시 걸었다. 복도 끝, 각별의 방 옆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수현의 시선이 끝까지 공룡의 뒤를 쫓았다. 자신이 들어갈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자판기에서 나오는 불빛이 조명빛을 집어삼켜 어둡게 만들었다. 버릇처럼 한숨이 나왔다. 사무실 안쪽에서 키보드 소리가 어렴풋이 울려퍼졌다.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공룡에게 들었던 내용이 조금 더 명확하게 정리되어 검은 텍스트로 나열됐다. 맨 끝 줄. 3일 뒤. 발레나와 회합. 3일. 속이 뒤엉켰다.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더 이상 뒤로 숨을 수는 없다. 억지로 다리를 붙잡아 일어났다. 사무실 문고리가 차가웠다. 손끝에 하얀 서리가 달라붙는 것 같았다. 3일. 그 안에 마음을 정리해야만 했다. 좋든 싫든 시간은 흘러간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대한 심장을 억눌러야만 한다.

*

"제가 안 따라가봐도 되겠어요?"

이신이 겁도 없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채 총구를 눈에 가져다댔다. 오발의 염려가 있을 법도 한데 태연했다. 제 살아온 세월의 반 이상을 총과 함께 살아온 탓이었다. 총 만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각별이 이신을 믿듯이.

"일단 저쪽이 말하는 대로 해줘야지. 괜히 헛짓거리 해서 파토낼 필요는 없으니까."

티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신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수현이 못미더웠다. 각별이 왜 수현을 감싸는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티티도 마찬가지였지만, 각별의 행동에 뜻이 있으리라 믿고 말을 아꼈다. 각별이 블라인드를 내렸다. 밖에서 흘러들어오던 빛무리가 뚝 끊겼다. 완전한 어둠 틈에서 노란 눈동자만 빛났다. 오랜 시간 봐온 그들로서는 그 의미를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각별은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찾아온 기회를 마다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늘 아슬아슬하게 경계 위에서 줄타기 하던 발레나를 확실히 밀어낼 기회였다. 각별은 따로 입을 열지 않고 가볍게 웃기만 했다. 따로 일러줄테니 기다려라. 무언의 지시를 받은 이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뒤를 티티가 따랐다. 텅 빈 큰 사무실 안에 각별 혼자 서 있었다. 하얀 정장에 그림자가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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