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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2)

 2. 발레나


법이 의미를 잃고 밤의 총성이 당연해진 때다. 골목길 구석구석마다 파리가 꼬였다. 굶어죽었는지 맞아죽었는지 알 수 없는 사체들이 하루에 하나면 적은 편이었다. 약과 폭력이 성행하는 밑바닥 끝에, 더 깊은 바닥이 있었다. 맨 아래 깔린 것들은 가장 더러운 것이면서, 위에 쌓인 것들의 근간이었다. 무엇보다 더러운 일에 손을 대며 동시에 고귀하신 윗동네의 뿌리를 쥐고 걸핏하면 흔들어대는 것들. 어중간하게 밟히기보다는 그 발을 쥐고 거래를 걸어오는 것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질척한 것들 중 하나가, 발레나였다.

발레나는 명맥에 맞지 않게 규모가 작았다. 보스 잠뜰을 포함한 단 다섯의 간부진과 그 밑으로 백이 될까말까 한 말단직원들. 딱 그정도. 조직보다는 길거리 갱에 가까운 규모였다.
보스인 잠뜰이 막 서른을 넘겼으니 간부진의 나잇대며 연륜도 다른 조직들에 비해서는 크게 뒤떨어졌다. 물 밑에서 근근히 퍼지는 소문 만으로 발레나를 접한 이들은 어떻게 발레나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적당한 정보통을 가진 이들은 남아있는 발레나의 간부들을 경계했다. 5년 전, 발레나 내부에서 몰아친 해일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쟁취한 이들이었다. 잠뜰은 그 중심에 있었다. 파도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자들의 머리에 친히 탄알을 박아넣고, 이빨 빠진 사자의 모가지를 꺾어 빈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5년이었다. 또 다른 반역의 싹을 미리 자르려는 건지 규모를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버티길 5년이었다.

똑똑, 똑. 수수하게 조각된 나무 문을 리듬감 있게 세 번 두드렸다.
다른 신분증명 절차는 필요 없었다. 문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라더가 예. 하고 낮게 답하고는 문을 열었다. 잠뜰이 맞이했다.

"빨리 왔네. 모여있었어?"
"예. 우연찮게 다들 휴게실에 모여있었습니다."
"덕개 찾으러 갔었거든요! 얘가 잠깐 쉬고 온다더니 두 시간이 지나도 안 와서, 누가 뒤통수라도 친 줄 알고 걱정돼서 찾으러갔더니 글쎄-"
"필요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죠."

라더의 뒤에서 몸을 빼꼼 내밀고는 입을 놀리기 시작한 또니를 필립이 저지했다. 덕개는 갑작스럽게 까발려진 자신의 농땡이에 당혹스러워하며 입을 달싹거리다가 그냥 멋쩍게 웃어버렸다. 잠뜰은 그런 모습을 보고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 조직의 간부 회의를 앞둔 자리라고는 믿기 힘들만한 활기였다. 라더는 그 사이에 껴서 입꼬리만 힘겹게 올렸다.

"그만. 그래서, 덕개가 수면욕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이거지? 죽진 않았으니 됐어. 일단 앉을까?"

잠뜰이 소란을 한 마디로 일축해 정리하고는, 개인 사무실 구석에 마련된 책상 상석에 먼저 앉았다. 나머지 간부진도 따라 자리를 잡았다. 잠뜰은 책상 구석에 놓여있던 서류철을 집어들고 내용물을 뿌렸다. 무언가 빼곡히 적힌 종이들 틈에서 가장 빳빳한 것을 찾았다.

"정보가 하나 들어왔다.
"

잠뜰은 종이를 책상 구석에 펼쳤다. 발레나의 거래장부와 항구 지도. 최근들어 급격히 거래량이 감소한 그래프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도시를 점거한 조직들은 오랜 권력다툼 끝에 각자의 영역을 확고히 한 상태였다. 주요 거래 품목도, 방식도, 시간도. 암시장 구석구석을 각자의 힘에 맞추어 쥐고 있었다. 서로를 건드려서 득 될 것이 없음을 알기에 함부로 영역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나 발레나의 영역은 손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권력교체로 규모가 심하게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많은 것이 발레나의 편이었다. 보스 잠뜰의 영향력은 한 사람의 분을 훨씬 웃돌았다. 그런 발레나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는 것은 자멸행위였다.

그럼에도 최근 발레나의 거래량이 줄었다는 건, 어디선가 굴러들어온 햇병아리가 제 주제도 모르고 세력을 닥치는 대로 키워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라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니는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 팔짱을 끼고 가만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변을 눈치채고 가장 먼저 잠뜰에게 고한 것이 또니였다.

"사전에 이야기한 거랑 다르지 않냐고 따지니까, 며칠 전부터 다른 거래처가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그쪽에서 돈은 배로 주고, 양도 세 배로 사들이니까 이쪽에 넘길 양이 없어졌다고."
"피에니타인가? 그쪽은 그쪽 나름의 큰 손이 계실텐데."
"피에니타는 아니에요. 완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어요."

'아니마'.

아니마는 물 밑에서 일어난 온갖 차별로 인해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추락한 모든 별
종들을 주워모은 조직이었다. 수장인 우재부터 말단 모두가 별종이었다. 별종답게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리라. 잠뜰은 아니마에 대해 모은 정보들을 책상 위에 흩뿌렸다. 수장 우재의 인상착의며, 가장 최근의 거래내용까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름도, 규모도 너무 작고 하찮아 금방 와해되리라 짐작했던 조직이 지금은 발레나를 위협할 정도의 거물이 되어있었다. 이는 공모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뜰은 항구 지도에 붉은 펜으로 선을 그었다. A구역 열세 번째 선창. 이곳이 아니마 녀석들의 다음 거래장소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잠뜰은 동그라미를 찍찍 그으며 말을 이었다.

"우린 이쪽으로 잠입해서 녀석들의 거래를 가로챈다. 일단 이쪽 판에서 신용을 잃게 만드는 거지."

또니가 손을 번쩍 들었다.
발언권이 주어졌다.

"거래내용 정보는 누가 준 거예요? 그쪽이랑 커넥션을 할 짬이 어디서 났다구. 믿을만 한 거예요?"
"레쏘가 준 정보야. 그 녀석들도 시뮬을 정보거래소로 이용하더라고."

조용히 구석에 앉아있던 필립이 드물게 말을 얹었다.

"레쏘가 왜요? 그 사람은 원래 정보 같은 거 안 흘리잖아요. 중립이니 뭐니 하면서."
"같은 별종들이 그러고 다니는 게 싫은 거겠지.
별종 이름 달고, 이러나 저러나 똑같이 더러운 일 하는 마당에 자기들이 정의의 사도인 양 그렇게 나대고 다니는 게…"
"그 사람 별종이었어요?"

갑자기 덕개가 책상을 팡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접혀있던 귀가 잠깐 펼쳐졌다가 도로 접혔다. 몰랐어? 하긴 몰랐을 수도 있겠다. 잠뜰이 덤덤히 손짓해 덕개를 앉혔다. 매번 모자 쓰고 다니잖아. 그리고 그 사람이 왜 너희만 오면 바 안에 죽치고 앉아 있겠냐. 꼬리랑 귀 가리려고 그러는 거지. 덕개는 그제서야 레쏘가 자신 앞에서 한번도 등을 보인 적 없음을 깨달았다. 매번 덕개의 앞에 자리를 잡고 서서 손짓 몇 번으로 하율을 시키기만 했지. 한번도 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유를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취객이 괜한 시비를 거는 걸 막고 싶은 거겠지. 조직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니만큼 시비가 걸리면 걷잡을 수 없이 되어버리니. 덕개는 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마저 이야기하시라고 고갯짓했다.
필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더 믿기 힘든데요. 같은 별종인데 별종들이 영향력 좀 넓혀보겠다고 만든 조직을 치게 도와준다니. 저라면 절대 안 그럴텐데."

필립의 귀가 특유의 모양으로 기울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 없었다. 잠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쉽게 믿긴 어렵지. 하지만 한번 믿어볼 가치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뭔가 수가 있으신 겁니까?"

라더가 입을 열었다. 잠뜰과 눈이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지내온 만큼 말하는 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잠뜰은 도박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
잠뜰은 잠시 입술을 꾹꾹 다물며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믿는 구석이, 아무래도 좋게 받아들여질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내키진 않지만… 피에니타 측에 공조를 요청할 거야."

*

둔탁하면서도 청명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허리를 숙여 캔을 집어들었다. 차가운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아직도 덕개에게 간부 회의는 숨막히고 답답한 시간이었다. 간부가 될 짬도 못되는 주제에 그 공간에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게 된 것도, 여러 목숨이 달린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것도 적응하기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고작 3년. 택도 없지.

"덕개야! 또 농땡이야?"

또니와 필립이 복도 끝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둘이 먼저 나가더니 무슨 이야기라도 했나. 필립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져있었다. 또니가 활짝 웃고 있어 더 두드러졌다. 농땡이라뇨. 커피 한 캔 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요. 덕개가 작게 웃으며 손에 든 커피캔을 흔들었다. 사수님들께 한 캔 쏴라. 덕개야. 또니가 능청스럽게 자판기 옆에 섰다.
그냥 들어가려는 필립의 옆구리를 쳐서 옆에 세우기까지 했다. 덕개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판기에 잔뜩 구겨진 지폐를 밀어넣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생각해?"
"뭘… 말입니까?"
"오늘 회의 때 나온 내용 말이야."
"… 글쎄요. 일단 보스께서 피에니타 측이랑 이야기를 해본 다음에야 뭐가 확실해질 것 같던데요. …."
"그 거래, 네가 가게 될 것 같아서 그래."

덕개의 입에서 당혹감이 섞인 바보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또니와 필립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늘상 하는 것처럼 놀리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보스가 직접 말하셨어요?"
"아니, 보스 생각은 모르겠는데- 아니마에는 별종들 밖에 없다며."

캔 뚜껑을 힘주어 따느라 잠깐 말이 끊겼다. 칙. 다시 입이 열렸다. 근거는 간단했다. 거래처에서도 아니마가 별종들이 모인 조직임을 알고 있을테니, 그 사이에 끼어들어 분탕을 치기 위해서는 우리 측에서도 별종이 가야만 한다. 중대사이니 만큼 일반 말단 직원에게 맡길 만한 일은 못된다. 그러니 간부진들 중, 별종인 사람. 또니가 필립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필립이 고의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보스가 쟤를 뭘 믿고 피에니타랑 같이 보내겠냐."

나도 그러기 싫은데, 보스가 그럴 리가 없지. 또니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필립은 그들 중 유일하게, 잠뜰의 아래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만하고 들어가죠. 필립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쟤, 요즘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알지? 또니도 말을 남기고는 뒤를 쫓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덕개는 순식간에 다시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중대한 거래 현장에 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같은 비보와 함께. 가뜩이나 무거워 떨어질 것 같은 어깨에 무게가 더해졌다. 가장자리가 살짝 어그러진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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