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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4)

4. 불편한 자리(1)


목을 죈 넥타이를 더 조였다. 셔츠가 불편하게 당겨져 도리어 주름이 졌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손끝이 어떻게든 정리해보려고 애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게 넥타이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 때문인지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머리가 배로 어지러웠다. 그래. 조금 불편한 정도니까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입 열지 않고, 조금만 참으면…….

"덕개야. 이리 와봐."

잠뜰이 조수석 등받이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몸을 틀자 벨트가 어깨를 꽉 붙잡았다. 손으로 벨트를 밀어 공간을 내니 잠뜰이 먼저 일어나다시피 해 덕개의 옷깃을 쥐었다. 꽉 조여진 넥타이 매듭을 붙잡아 반쯤 풀고는 우그러진 셔츠끝을 쫙 폈다. 흔들리는 차 안인데도 꽤나 능숙했다.

"넥타이 그렇게 세게 매는 거 아니야. 그리고 불편하면 안 해도 돼."
"… 얕보일까봐요."
"야, 이 판에 넥타이 거추장스럽다고 안 하는 것들 널렸어."

어차피 더러운 일 하는데 말끔해보이면 얼마나 말끔해보이겠다고. 잠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넥타이를 놓았다.
숨이 조금 편해지자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덧씌워졌다. 잠뜰은 별나다. 조직 내부를 완전히 뒤집어버려서 꼭대기에 오른 것 치고는 딱히 권력을 누리고 싶지 않아했다. 이전부터 밑에 두고 가르쳤다던 라더나 또니에게는 그러려니하지만,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고 사적인 접점도 없는 덕개에게도 허물 없이 대하는 건 정말 특이했다. 잠뜰이 간부진들 중 그나마 어려워하는 사람은 필립 뿐이었다. 자신의 어중간한 자비가 남긴 유일한 과거의 잔재. 허튼 짓을 할 강단이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신뢰할 수도 없는 사람. 쟤를 뭘 믿고 보내겠냐. 또니의 말이 어른거렸다.

"뭐해? 끝났어. 앞에 봐."

잠뜰이 덕개의 고개를 손끝으로 쭉 밀어 강제로 앞을 보게 만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필립이 중요한 게 아니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절대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무언가 꾸미고 있었다면 진작에 해냈을 사람이다. 지금 중요한 건 눈 앞에 놓인 회합이었다.
다시 속이 조여오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켰다. 라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운전대를 놓았다.

"
도착했습니다."

회합 장소는 피에니타의 사옥이었다. 발레나의 요구로 이루어진 회합이고, 참여하는 인원도 발레나의 뜻대로였으니 장소라도 마음대로 정하겠다는 이유를 댔다. 잠뜰의 입장에서는 적진의 아가리로 직접 들어가는 꼴이었으나, 각별이 공공의 적이 확실한 상황에서 무리수를 둘 만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에 걸었다. 라더는 차에서 내리며 안주머니에 든 총을 점검했다. 안 들키게 조심해. 자기들이 홈그라운드로 불러놓고 이런 걸로 책 잡으면 양심 없는 거죠. 덕개도 총알을 세었다.
역시 내 새끼들이다. 잠뜰이 기분 좋게 웃으며 방탄유리로 된 두꺼운 문을 벌컥 열었다.

*

초침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5분, 발레나 측과 약속한 시간까지 어림잡아 5분. 각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룡의 시선이 각별의 행동을 따라갔다.

"직접 맞아드리게?"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각별이 넥타이 매듭을 꾹 조였다. 그 모습을 보고는 괜히 빈 셔츠깃을 만지작거렸다.
공룡은 넥타이를 하지 않았다.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서도 잠시 매고 있다가 금방 풀어버리곤 했다. 그게 반복되자 각별은 공룡에게 넥타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내려주었다. 그것으로 트집을 잡아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각별은 넥타이를 잘 매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수십, 수백번은 매왔음에도 늘 매듭이 어그러졌다. 매고 풀기를 여러번 반복해야만 겨우 볼만한 매듭이 만들어졌다.
차라리 풀어버리라는 주변의 조언에도 굳세게 엉성한 매듭을 고수했다.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아무에게도 책잡히지 않을 위치에 올라왔지만, 각별은 넥타이를 조였다. 공룡의 넥타이는 쉽게 풀어버렸으면서, 자신에게만 그렇게 했다.

"안 따라와?"
"나도 가?"

각별은 답하지 않았다. 공룡은 한숨을 내쉬고는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수현에게 금방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현은 단단하게 엮어둔 손끝을 풀어 흔들고는 닫힌 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문이 다시 열리지 않길 바랐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세상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고 말 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수현은 눈을 감았다.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세상에 빠르게 적응하려면 눈을 감아야만 했다.

*

높게 묶은 머리카락 끝이 하얀 정장 자켓 끝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노란 눈동자가 여유롭게 접히는 눈꺼풀 틈으로 반쯤 모습을 감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뜰은 마주 웃으며 적의를 감추었다.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해야했다. 감정을 숨기는 건 각별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워지는 거리 사이에 불편한 감정들이 끼어들어 밀도를 높였다. 덕개는 답답한지 어느새 넥타이 매듭을 살짝 당겨 풀었다. 각별의 옆에 공룡이 있었다. 특유의 능글거리는 웃음이 악의 없이 신경을 거슬렀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각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형식적인 환영인사가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잠뜰이 손을 잡았다. 칼과 총을 쥐어 흉터와 굳은살이 배긴 제 손과 다르기 각별의 손은 말끔했다. 그 자리까지 올라오는 데에 어떤 고난과 역경도 거치지 않은 자의 손이었고, 절대적인 권력의 무게로 단단하게 둘러싸인 손이었다.

각별이 먼저 손을 놓고 뒤를 돌았다. 그 찰나에 각별 뒤에 서 있던 공룡의 시선이 라더에게 닿았다.
사나운 붉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몸을 꿰뚫었다. 공룡은 손끝이 저릿한 느낌에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 시궁창에 처박혀 살아. 다 갈라진 목소리로 일갈했던 기억이 목구멍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각별이 공룡의 옆을 스쳐가며 팔꿈치로 팔을 쳤다. 움직여. 그제서야 맞아떨어지던 시선이 어긋났다. 공룡의 뒤로 잠뜰과 라더, 덕개가 차례로 따랐다. 넓은 복도에 구두굽이 바닥을 찍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알 수 없는 예민함이 공기 전체를 감쌌다.

적진으로 파고든다는 리스크를 안은 건 발레나 뿐이 아니었다. 피에니타 역시, 폭탄을 끌어안은 적들을 산 채로 아가리에 집어넣은 꼴이었다. 숨을 잘못 마셔 삼켜버렸다가는 몸뚱이가 터져나가고 말 게 분명했다. 공룡은 마른 침을 삼켰다. 빈 셔츠 앞섶 위에 손이 허공을 놀았다. 각별은 묵묵히 걸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박자에 맞추어 목깃을 쓸었
다.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고 여유롭지도 않았다. 보폭이 반듯하면서 동시에 흐트러져있었다. 공룡은 뒤를 곁눈질했다. 잠뜰의 시선이 각별의 뒤통수 너머 정면을 응시하는 눈을 꿰뚫었다. 덕개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라더는….

"여기까지 오는 걸 승낙할 줄은 몰랐습니다."

각별이
회의실 문고리를 붙잡고 처음으로 침묵을 깼다. 결렬되면 아쉬운 건 우리니까요. 잠뜰이 답했다. 뻑뻑한 문고리가 특유의 녹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적당히 널찍한 회의실 안에 수현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하얗게 늘어진 귀가 쫑긋거렸다. 붉은 눈동자가 바쁘게 회의실 안으로 몰려든 무리를 살폈다. 고개만 꾸벅이고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아, 저쪽이 이번 임무에 나갈…."
"수현이라고 합니다."

공룡이 잠뜰의 말을 중간에 끊고 터벅터벅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늦은 가을에 어울리는 냉기가 순식간에 회의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분위기를 풀며 멀뚱히 서 있는 사람들을 제 자리에 앉힌 건 각별이었다. 어쩌다보니 라더와 공룡이 마주앉았다. 수현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덕개를 향해 가볍게 웃어보였다. 어쩌다보니 생 초짜들이 별종이라서.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럼… 제대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적당히 한기가 가라앉고 각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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