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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6)

6. 보이지 않던 것들

탕, 땡그랑. 무수히 구멍이 뚫린 드럼통 한 가운데에 또 구멍이 났다. 아까 생긴 구멍에 반쯤 걸쳐있었다. 덕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가늠쇠에 시선을 붙이고 있던 눈이 뻐근했다. 뒤에서 또니가 의례적인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많이 늘었네?
"

드럼통 걸레짝 된 거 봐라. 그렇게 말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무게가 절반은 줄었을 드럼통을 발로 깡 소리가 나게 차버렸다.
어디서 뺨 맞고 드럼통한테 성질이에요? 덕개가 괜히 중얼대며 방아쇠의 안전장치를 도로 걸었다. 제대로 걸렸나 확인하기 위해 허공을 겨누어보았다. 총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버릇이었다. 덕개는 걱정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일단 들이박고 보는 성정이었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매번 제동장치를 준비했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찰칵. 총알은 날아가지 않았다.

화풀이는 무슨. 또니가 제가 차 엎어트린 드럼통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섰다.
그러다 굴러가면 머리 깨져요. 너한테 넘어질 건데. 시덥잖은 농담을 나누며 공터를 천천히 빠져나갔다. 디데이가 다가온다. 건물 벽에 떡하니 붙어있는 전자시계의 빨간 숫자가 바뀔 때마다 초조함만 늘었다. 언제나와 같은 또니의 우스갯소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잠뜰이나 라더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 가벼웠고, 제 밑에 있는 몇 없는 조직원들이나 시뮬의 직원들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또니는 수 틀리면 다 조져버리고 오라는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조언만 남겼고, 필립은 회의 이후 사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게 드리워진 불신의 시선을 새삼 깨달은 모양이었다.

덕개는 제게 향하는 신뢰의 출처를 늘 궁금해했다.
또니처럼 용감한 것도 아니었고, 라더처럼 능력이 출중한 것도 아니었다. 필립처럼 사용처가 명확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조차 기적이었다. 왜 잠뜰이 생각을 바꾸어 총을 내렸는지, 왜 또니가 잘 부탁한다며 손을 내밀었는지. 덕개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제 손에 밟힌 서류뭉치와 차갑고 딱딱한 대리석 바닥의 촉감만 확실하게 남아있었다. 제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으리라는 추측 정도야 할 수 있었지만, 그게 몇 년동안 이어진 신뢰의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누구도 그따위 이유로 중요한 간부 자리며 임무를 덜컥 맡기지는 않을 테니까. 덕개 자신도. 생각을 따라 곱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

"우리 사장님이 그랬을 리가 없는데? 진짜요?"


글라스 밑바닥과 테이블이 부닥치는 소리가 높아진 어조에 맞게 컸다. 쉿. 비밀이라고 했잖아. 공룡이 급하게 입술 앞에 손가락을 대었다. 아, 예.
그 다급함에 맞추어 육식토끼의 목소리도 함께 작아졌다. 몸은 왜 구겨 테이블 위에 기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티 나게 할 거야? 공룡의 핀잔에 허리를 펴고는 글라스에 찬찬히 술을 채웠다. 따로 주문을 하진 않았지만 공룡이 이 곳에 올 때 주문하는 술은 항상 정해져있었다. 블루 스카이. 오래 전에 작별을 고한 푸른 낮 하늘의 색. 육식토끼가 익숙하게 보드카와 큐라소를 섞었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가사 모를 가요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어설프게 하모니를 이루었다. 육식토끼는 그 틈의 짧은 정적 사이를 놓치지 않고 비집어 들어왔다.

"그런데, 정말 안 믿겨지네요. 우리 사장님 아시잖아요. 이 장사 하면서 한번도 정보 팔아넘긴 적 없는 거."
"우리도 의외였어. … 발레나가 협력을 청해온 것도 의외였고. 그걸 믿기로 했다는 게 가장 의외였고."

어느새 잔 한 가득 채워진 푸른 하늘색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바 시뮬. 뒷골목 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조직들의 거래장소로 이용되기 시작해 이제는 조직원들 외에는 누구도 발걸음하지 않게 된 비운의 장소였다.
사장 레쏘는 시뮬의 이용방식이 바뀌었음을 빠르게 눈치채고 발빠르게 내부적인 규칙을 세웠다. 누구에게도 타 조직의 정보를 팔아넘기지 말 것. 아는 것이 있더라도 입을 다물 것. 시뮬의 종업원들은 각자의 성향과 친분에 따라 자유롭게 각 조직과 소통했지만, 그 두 규칙만은 철저하게 지켰다. 함부로 정보를 흘렸다가 어떤 꼴이 날 지는, 뒷골목에서 오래 살아온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니마라면 사장님이 주로 상대하셨죠. 그쪽에서도 사장님만 찾고."

그런 규칙을 세우고 확실하게 이행할 것을 강조한 레쏘가 앞장서서 규칙을 어기고 발레나에게 아니마의 정보를 넘겼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육식토끼의 말대로 아니마를 주로 상대하던 사람이 레쏘라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신뢰와 유대관계를 쌓아두고는 그걸 한 순간에 허물어버린다. 레쏘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공격적이고 도박에 가까운 행위였다.
각별과 잠뜰은 우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더 캐묻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본 모양이지만, 공룡은 아니었다.

"보통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안 알려줄 거지?"
"우리 바 규칙 몰라요?"
"알아. 아는데, 상황이 좀 그렇잖아."

육식토끼가 장난스레 인상을 콱 찌푸렸다. 한 발 빼라는 신호였다. 공룡이 손을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차라리 레쏘에게 직접 묻는 편이 빠르겠는데. 괜스레 몰려오는 초조함에 테이블 모서리를 갉작였다. 어느새 글라스에 맺힌 물방울이 테이블을 흠뻑 적셨다. 안 마셔요? 육식토끼의 말에 그제야 글라스를 쥐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알코올이 넘어가는 목 끝에서는 시고 쓴 맛이 났다. 육식토끼는 몸을 돌려 바 끝에 진열된 빈 글라스들을 하나하나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 이상 해줄 이야기는 없다. 이 이상 들어줄 이야기도 없다. 공룡은 목구멍에 남은 잔향을 억지로 삼켰다.
진열장에 붙은 네온사인이 슬슬 번졌다.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던 시선이 자연스레 육식토끼에게 향했다. 적당히 묶어 정리한 머리칼 밑으로 검게 축 처진 귀가 보였다. 어두운 바의 조명과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귀였다.

*

잠뜰은 가끔씩 제가 이뤄낸 모든 것들이 한낱 꿈이 아닐까 의심했다. 무언가 큰 일을 앞둔 시점에서는 더욱 그랬다. 자신이 지금 등을 붙이고 발을 올려 앉은 이 자리를 얻기 전날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체제를 뒤엎는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면서도, 생각보다 순식간에 마무리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뺨에 들러붙은 시대의 흔적을 문질러 닦아내며 보았던 야경이 아직도 눈 앞에 선연했다. 라더야, 이거 봐라. 이제 다 우리 게 될 거야. 우리들은 어렸고, 더 어렸다.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록 푸른 태양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푸른 태양에 가까워질 수 없다면 내핵을 마주하는 것이 옳았다. 라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붉어진 손을 내리고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똑똑똑, 불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라더가 아니었다. 라더를 제외하면 이 시간에 저를 찾을 사람은 적었다. 말단들은 감히 보스의 방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으니 제외, 필립은 회의 이후로 보기 힘들어졌으니 제외, 또니도 이유가 없으니 제외. 똑똑똑, 노크 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잠뜰이 허락을 내렸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손가락 몇 개가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더니, 곧 덕개가 나타났다.

"아, … 아직 계셨네요."
"있는 거 알고 문 두드린 거 아니야?"


아, 덕개가 멋쩍게 웃으며 뒷덜미를 긁적였다. 왜 멀뚱히 있어. 들어오라니까. 소리 없이 열렸던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셔츠 소매가 잔뜩 구겨져있었다.

"맞다. 내일이지. 많이 긴장돼?"
"…예, 그것도 그건데요. 여쭤볼 게 있어서요."

덕개가 천천히 다가왔다. 책상 위에서 다리를 내리고 허리를 곧게 폈다.
물어볼 일? 왜 필립을 믿지 않는지, 왜 하필 피에니타와의 공조인지. 머릿속으로 갖가지 시나리오와 그에 따른 답이 스쳐갔다. 덕개가 소매를 구겼다. 꾹 다물린 입이 몇번 벙긋거렸다. 잠뜰은 기다렸다. 덕개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며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에서 흘러들어온 푸르고 붉은 불빛들이 벽면에 아지랑이를 남겼다. 색 몇 개는 덕개의 얼굴을 비췄다. 붉은 물이 든 덕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왜 그날 저를 죽이지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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