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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From. Underground (8)

8. 물보라(1)


닭의 목을 비틀어도 태양은 뜬다. 속절없이 아침이 왔다. 흐릿한 눈을 비비며 옆을 돌아보니 공룡이 누워있었다. 깨워줄까 물어보던 새벽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가슴팍을 팍 때렸다.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는 꼴이 퍽 볼만 했다. 부스스하게 엉킨 머리카락을 적당히 빗어내고 깔끔한 검은 정장을 챙겼다. 넥타이를 매는 손이 계속 미끄러졌다. 공룡에게 부탁하려다가 공룡도 넥타이를 잘 매지 못함을 기억해내고는 그만두었다. 대칭이 맞지 않는 넥타이를 몇번씩 건드리다가 아니마에 대해 들었던 정보를 상기했다. 대부분이 가족에게 버려져 길거리를 떠돌던, 갈 곳 없는 별종들인 조직. 그 별종들이 넥타이를 귀신같이 잘 맨다면 그것도 이상하게 보이겠지. 수현이 거울에서 시선을 떼었다. 늘 입던 정장이 오늘은 몸을 죈 밧줄처럼 느껴졌다. 안주머니가 묵직했다. 익숙하지 않은 쇳덩이가 금방이라도 말을 듣지 않고 불을 뿜을 것 같았다. 오싹한 감각에 괜히 꺼내어 잠금쇠를 점검했다. 화장실 안쪽에서 공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돼? 조금. 별 일 없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활기 밑으로 묘한 긴장감이 작은 실처럼 진동했다. 수현이 문고리를 잡았다. 먼저 갈게. 저녁에 보자.

*


"왜 그렇게 긴장을 했어?"

오늘은 친히 잠뜰이 운전대를 잡았다. 덕개는 손톱 끝만 딱딱 물어뜯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덕개야. 잠뜰이 한번 더 불렀다.
그제야 예, 하며 고개를 돌렸다. 3년 간 이런저런 더러운 일들을 많이 해왔지만, 이번 일은 느껴지는 무게가 달랐다. 살아있는 신호탄이 되어 산화될 준비를 해야만 했다. 전쟁은 그렇게 시작된다.

"… 보스, 일이 잘못 되면 어떡하죠."

끼익, 때마침
유리창 뒤로 비친 붉은 불에 잠뜰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정거의 충격이 적지 않았는지 정적이 흘렀다. 차라리 잠뜰이 헛소리 하지 말고 잘 할 생각 하라고 일갈했으면 괜찮았을 것을, 그러지 않으니 피만 말렸다. 먼저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보ㅅ-

"덕개야."

굳은살과 자잘한 흉터가 가득한 손가락이 뺨을 쥐어잡았다. 시야 한 가득 검은 눈동자가 들어찼다. 곧 위아래가 옅게 접히더니
옆에서 노란 불빛이 비쳐들었다. 덕개야. 특유의 단단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근거 없는 신뢰가 다시 등을 짓누른다. 잠뜰이 입을 열었다.

"누나는 너 믿어. 너는 잘 할 거야."

푸른 불빛이 깜빡였다. 차들이 요란하게 재촉하기 시작했다.

*


쇠 냄새와 바다 냄새가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별종 특유의 예민한 코는 그 냄새를 순식간에 잡아냈다. 그 틈에 은밀하게 섞인 혈향은 덤이었다. 차가 멈추자 수현이 가까이 다가갔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덕개가 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분위기를 풀려는 듯 먼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덕개도 거절하지 않았다. 잠뜰은 덕개가 트렁크에서 검은 서류가방과 은색 철제가방을 챙겨드는 걸 확인하고는 손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순식간에 넓디넓은 항구 내 컨테이너들 사이에 수현과 덕개 둘 만이 남겨졌다. 수현이 시계를 꺼내들었다. 남은 시간 1시간. 아니마의 조직원들은 보통 30분 전에 거래 장소에 도착한다고 하니 딱 적기에 도착했다. 수현은 천천히 계획을 복기했다. 아니마 조직원들이 거래 장소에 도착하면 그들을 처리하고 그 자리를 꿰찬다. 각별은 계획을 설명하며 여기에 각주를 덧붙였다. 최대한 유혈사태는 이 선에서 끝낼 것. 끝내게 될 것. 잠시 잊으려고 노력했던 안주머니의 무게감이 두세 배의 질량으로 수현을 땅 끝으로 끌어내렸다. 발자국이 깊게도 남으리라. 발목이 땅에 박힌 듯 멈추었다.

덕개는 항구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적막했다. 컨테이너를 운반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끼긱, 텅. 그 틈으로 바다의 파도 소리가 어울리지 않는 청량함을 뽐냈다.
그 사이를 은밀하게 파고드는 인부들의 시답잖은 대화. 덕개는 잠시, 여기 세워진 컨테이너들 중 적법한 것을 담고 있는 게 어느 정도나 될까 생각했다. 대다수의 컨테이너에는 총기가, 약이, 허가 받지 않은 것들이 있겠지. 그런 세상이니까. 생각보다 어두운 일들은 도리어 빛 아래에서 행해진다. 묘한 약 냄새가 콧속을 침범했다. 아니나다를까. 덕개는 제가 짚고 있던, 냄새가 흘러나오는 붉은 컨테이너를 손끝으로 툭 쳤다.

"아직 조직원들은 없는 것 같죠?"

수현이 예민하게 귀를 쫑긋거렸다. 아직. 별종은 우리 뿐이네요. 덕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A구역, 열세 번째. 컨테이너에 적힌 하얀 페인트 숫자를 더듬어가며 길을 찾았다.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수현이 뒤를 바쁘게 쫒았다. 덕개의 행동은 생각보다 노련했다. 언제 긴장했느냐는 듯 시선이 딱 필요한 만큼만 바쁘게 움직였다. 마른 침을 삼켰다. 8년간 공룡의 뒤에서 최소한의 피를 묻힌 수현과, 3년동안, 그간 라더가 해온 일과 동일한 수준의 일을 그 이상 많이 해온 덕개는 그 숙련도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경력의 길이를 넘는 차이가.
회의실에서 긴장을 못 이겨 손끝을 물어뜯던 사람은 온데간데 없었다. 천직이네. 수현이 중얼거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고요를 깨고 검은 차 하나가 조심성 없이 요란하게 울어대며 선창으로 돌진했다.
자신이 이 곳에 왔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도 상관 없다는 듯이, 어쩌면 누군가 알아주길 바란다는 듯이. 덕개와 수현이 급하게 붉은 컨테이너 뒤로 몸을 숨겼다. 선팅이 짙게 된 차창이 살짝 내려가더니 그 틈 사이로 작은 동물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니마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시간을 확인했다. 30분 전. 지금부터 30분 안에 저 차에서 내리는 조직원을 처리하고 위장까지. 목울대가 출렁였다. 수현이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다댔다. 긴장할 거 없어. 상대는 눈치채지 못했어. 컨테이너에 달라붙다시피 몸을 숨긴 덕개의 눈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곧 내려. 계획대로. 다리나 팔을 먼저 쏴 전투불능으로 만든 뒤, 거래 암구호 등에 대한 정보를 빼내고, 처리한다. 긴장할 거 없어. 수현이 천천히 귀를 세웠다.

컨테이너 밖으로 살짝 몸을 뺐다. 검은 차량의 운전석이 천천히 열렸다. 조수석도 거의 동시에 열렸다. 뒤편에서 인부들이 이제 갈까, 하고 짐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에서 별종 중에는 평범한 축에 속하는 고양이 별종이 먼저 내렸다. 신체능력이 좋긴 하지만 하나 이상을 감당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수석, 천천히 조수석에서 내린 사람의 실루엣이 차 너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얀 귀, 검은 머리칼. 천천히 뒤를 돌았다. 붉다 못해 검은 눈동자, 눈 밑으로 나 있는 검은 줄무늬, 여유로운 표정과, 검은 정장.

수현은 그를 알았다. 덕개도 그를 알았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한번도 고려된 적 없는 인물이 나타나고야 말았다. 덕개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분명….

"…우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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