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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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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7) 7. 목줄 발 딛고 선 곳이 나락은 아니리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햇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비를 맞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늘진 곳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사는 이들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던 때가 있었다. 발로 짓밟히면서도 으깨지지 않음에 감사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차악의 삶에 감사하며, 감히 위로 고개를 치켜들지 않으며. 밑바닥 인생들이 늘 그러는 것처럼 간혹 삶을 위한 죄를 저지르며 그렇게 살았다. 덕개는 그 삶에 만족했다. 더 위로 갈 수 없으니 더 밑으로 꺼지지만 말자고. 야윈 손을 붙잡고 매일 아침 응답 없는 신을 향해 기도했다. 신은 덕개에게 그저 최소한의 안전망 같은 존재였다. 덕개는 살기 위해 움직였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
From. Underground (6) 6. 보이지 않던 것들 탕, 땡그랑. 무수히 구멍이 뚫린 드럼통 한 가운데에 또 구멍이 났다. 아까 생긴 구멍에 반쯤 걸쳐있었다. 덕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가늠쇠에 시선을 붙이고 있던 눈이 뻐근했다. 뒤에서 또니가 의례적인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많이 늘었네?" 드럼통 걸레짝 된 거 봐라. 그렇게 말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무게가 절반은 줄었을 드럼통을 발로 깡 소리가 나게 차버렸다. 어디서 뺨 맞고 드럼통한테 성질이에요? 덕개가 괜히 중얼대며 방아쇠의 안전장치를 도로 걸었다. 제대로 걸렸나 확인하기 위해 허공을 겨누어보았다. 총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버릇이었다. 덕개는 걱정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일단 들이박고 보는 성정이었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From. Underground (5) 5. 불편한 자리(2) 검은색 철제 책상 위에 여러 종류의 종이들이 어지럽게 놓였다. 레쏘의 사진, 거래 장소의 지도, 몰래 찍은 것으로 보이는, 우재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 아니마의 뒷모습. 카메라의 존재를 인식한 것인지, 곁눈질로 쏘아보는 붉은 눈동자가 매서웠다.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카메라 뒤에서 계책을 짜는 이들을 농락하듯이. 알 수 없이 부아가 치밀었다. 얕보이고 있다. 이깟 별종에게, 철저히 얕보이고 있다. 각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해서, 항구에서 곧 거래가 진행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잠뜰이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각별은 간간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뜰의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별종 간부진 둘이 아니마의 조직원으로 위장하여 거래 현장을 가로채고, 훼방을 놓는다. 이 과정에서..
From. Underground (4) 4. 불편한 자리(1) 목을 죈 넥타이를 더 조였다. 셔츠가 불편하게 당겨져 도리어 주름이 졌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손끝이 어떻게든 정리해보려고 애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게 넥타이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 때문인지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머리가 배로 어지러웠다. 그래. 조금 불편한 정도니까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입 열지 않고, 조금만 참으면……. "덕개야. 이리 와봐." 잠뜰이 조수석 등받이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몸을 틀자 벨트가 어깨를 꽉 붙잡았다. 손으로 벨트를 밀어 공간을 내니 잠뜰이 먼저 일어나다시피 해 덕개의 옷깃을 쥐었다. 꽉 조여진 넥타이 매듭을 붙잡아 반쯤 풀고는 우그러진 셔츠끝을 쫙 폈다. 흔들리는 차 안인데도 꽤나 능숙했다. "넥타이 그렇게 ..
From. Underground (3) 3. 피에니타 "발레나 측에서?" 책상 위를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발레나 측에서. 각별이 책상 한쪽으로 밀어둔 서류뭉치 맨 위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냈다. 난잡하지만 확실하게 빨간 선이 그려진 항구 지도와, 아니마의 수장 우재의 사진. 공룡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물품을 약속한 만큼 받지 못해 따지러가면 언제나 그 이름이 나왔다. 아니마. 우재. 갑작스럽게 뭍으로 올라온 조직과 그 수장. 겁도 없이 야금야금 영역을 침범하는 하이에나 같은 것들. "레쏘가 발레나 측에 먼저 정보를 넘기면서 부탁했던 모양이야. 아니마를 정리해달라고." "레쏘가 왜? 그 사람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며." "레쏘의 눈에도 아니마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는 게 보인 거겠지. 조직 간의 균형을 신나게 망가뜨리고 있잖아. ..
From. Underground (2) 2. 발레나 법이 의미를 잃고 밤의 총성이 당연해진 때다. 골목길 구석구석마다 파리가 꼬였다. 굶어죽었는지 맞아죽었는지 알 수 없는 사체들이 하루에 하나면 적은 편이었다. 약과 폭력이 성행하는 밑바닥 끝에, 더 깊은 바닥이 있었다. 맨 아래 깔린 것들은 가장 더러운 것이면서, 위에 쌓인 것들의 근간이었다. 무엇보다 더러운 일에 손을 대며 동시에 고귀하신 윗동네의 뿌리를 쥐고 걸핏하면 흔들어대는 것들. 어중간하게 밟히기보다는 그 발을 쥐고 거래를 걸어오는 것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질척한 것들 중 하나가, 발레나였다. 발레나는 명맥에 맞지 않게 규모가 작았다. 보스 잠뜰을 포함한 단 다섯의 간부진과 그 밑으로 백이 될까말까 한 말단직원들. 딱 그정도. 조직보다는 길거리 갱에 가까운 규모였다. 보스인 ..
From. Underground (1) 1. 밑바닥 세상은 썩었다. 구제의 여지 없이 썩어문드러졌다. 그게 공룡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명분이었다. 경찰은 뒤로 돈을 받아처먹고 죽어가는 사람을 발로 차 숨겨주며, 정치인은 높은 곳의 표를 받기 위해 밑에 있는 사람들을 발로 짓밟는다. 어디서 벽돌이 떨어져 사람 머리가 깨져도, 의사는 돈을 받지 않으면 치료해주지 않는다. 낮은 밤이고 밤은 더 깊은 어둠인 곳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공룡의 익숙한 일장연설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라더는 일어나 무릎을 털고 수현은 하품을 하며 툴툴거렸다. "말 긴 거 봐라. 그래서 남의 집 터는 건 그런 것에 비하면 약과다?" "내 말은 우리가 하는 일까지 그냥 죄라고 뭉뚱그려지면 안된다는 얘기지." "공룡아. 우리 죄 짓는 건 맞아." "그럼 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