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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Underground (11) 11. 물보라(4) "이름이 뭐라고?" "라더…요." 멍 투성이 팔뚝을 하얀 붕대가 감쌌다. 닿은 곳이 금세 붉게 더럽혀졌다. 차라리 붕대를 빨간 색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더러워지지 않게. 잠뜰이 붕대 끝을 꽉 당기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상처가 꽉 눌리자 입에서 우그러진 숨이 샜다. 자, 됐다. 잠뜰이 히죽 웃으며 붕대 위를 짝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차마 제어하지 못한 비명에 가까운 단말마가 튀어나갔다. "그래도 너 대단하더라. 신고식에서 그렇게 오래 버티는 애는 처음 봤어." 잠뜰은 상기된 얼굴로 라더가 그 검은 양복들 사이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서 있었는지, 작은 어린애 하나 이기지 못해 쩔쩔매는 꼴들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싸우는 ..
From. Underground (10) 10. 물보라(3) 공룡이 강하게 바 테이블을 내리쳤다. 레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워낙 거친 밑바닥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자연스레 담이 세진 게 분명했다. 이런 방식은 안 통하겠네. 공룡은 위협적으로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풀고 자리에 바르게 앉았다. "사장님, 유감은 없는 거 알죠?" 레쏘가 어깨를 으쓱였다. 손에 쥔 잔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닦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문질러 닦아댔다. 대화를 거부하는 건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한 작은 방어기제인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인지는 레쏘만이 알 일이었다. 공룡이 힐끗 바 내부를 살폈다. 육식토끼나 하율은 보이지 않았다. 찾아올 줄 알고 일부러 먼저 보냈나. 공룡은 몸을 노골적으로 기울여 레쏘에게 가까..
[초능력 세계 여행] 책임 수몰된 어린 날들에게 IPS 사옥 내에서 가장 늦게 불이 꺼지는 곳은 국장의 사무실이었다. 각별은 늘 모든 사람들이 집에 돌아간 이른 새벽까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곤 했다. 그의 강박에 가까운 책임감이 서류들을 두 번 세 번 확인하지 않고서는 차마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없게 했다. 돌아갈 집이 딱히 없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거주지로 등록된 자택은 있었지만, 딱히 마음을 붙이고 쉴 집은 없었다. 각별은 침대에 몸을 뉘여도 손에 서류가 붙들려 있을 것을 잘 알았다. 그럴 바에는 사무실에 하루 종일 붙어있는 게 낫다는 것도. 블라인드 틈새로 새벽의 하얀 햇살이 밀려들었다. 안 그래도 새하얀 종이와 새하얀 조명에 뻐근해진 눈두덩이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각별은 하얀색에 내성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하얗고..
From. Underground (9) 9. 물보라(2) 우재가 천천히, 제가 내린 차를 중심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차를 탔는지 뻐근함에 못 이겨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수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다. 단순한 거래 현장에 어째서 수장인 우재가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잠뜰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각별은? "…레쏘." 지리멸렬하게 얽혀 책임소재를 찾던 신경이 단 한명에게 몰렸다. 레쏘. 거래에 대한 정보를 주고 아니마를 처리해달라 부탁한 사람. 레쏘. 그는 분명 알았을텐데. 단순히 거래를 탈취하여 선전포고를 날리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그는 분명 알았을텐데. "… 레쏘가 우릴 속였어." * "…그래, 여차하면 직접 개입해서 처리해." 각별이 먼저 무전을 끊었다. 뻐근하게 두통이 밀려왔다. 일이 꼬였다..
From. Underground (8) 8. 물보라(1) 닭의 목을 비틀어도 태양은 뜬다. 속절없이 아침이 왔다. 흐릿한 눈을 비비며 옆을 돌아보니 공룡이 누워있었다. 깨워줄까 물어보던 새벽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가슴팍을 팍 때렸다.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는 꼴이 퍽 볼만 했다. 부스스하게 엉킨 머리카락을 적당히 빗어내고 깔끔한 검은 정장을 챙겼다. 넥타이를 매는 손이 계속 미끄러졌다. 공룡에게 부탁하려다가 공룡도 넥타이를 잘 매지 못함을 기억해내고는 그만두었다. 대칭이 맞지 않는 넥타이를 몇번씩 건드리다가 아니마에 대해 들었던 정보를 상기했다. 대부분이 가족에게 버려져 길거리를 떠돌던, 갈 곳 없는 별종들인 조직. 그 별종들이 넥타이를 귀신같이 잘 맨다면 그것도 이상하게 보이겠지. 수현이 거울에서 시..
From. Underground (7) 7. 목줄 발 딛고 선 곳이 나락은 아니리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햇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비를 맞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늘진 곳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사는 이들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던 때가 있었다. 발로 짓밟히면서도 으깨지지 않음에 감사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차악의 삶에 감사하며, 감히 위로 고개를 치켜들지 않으며. 밑바닥 인생들이 늘 그러는 것처럼 간혹 삶을 위한 죄를 저지르며 그렇게 살았다. 덕개는 그 삶에 만족했다. 더 위로 갈 수 없으니 더 밑으로 꺼지지만 말자고. 야윈 손을 붙잡고 매일 아침 응답 없는 신을 향해 기도했다. 신은 덕개에게 그저 최소한의 안전망 같은 존재였다. 덕개는 살기 위해 움직였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
[전설 합작] 그 해변에는 인어가 살고 있대 뜰팁 전설 합작 참여글입니다. 합작 링크 : 글 : 옌(@YEN_DdeulT) / 그림 : DUA (@dua_1115) 아이는 종종 환각을 본다. 정확하게는 상상을 실제처럼 보는 것이지만, 무엇이든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제로 본다는 점에서 환각과 다를 바 없다.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기에 상상과 세상의 경계에서 자유롭다. 상상의 종류는 다양하다. 책에서 보았던 요정, 침대 밑에 떨어져있던 인형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괴물, 또는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속 진위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라더의 환각은 이야기를 타고 왔다. * 푸른 지붕들이 늘어서있는 작은 마을의 오솔길로 새어나가는 바람을 따라가다보면 금방 파도소리가 들렸다. 하얀 모래들이 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포말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해..
From. Underground (6) 6. 보이지 않던 것들 탕, 땡그랑. 무수히 구멍이 뚫린 드럼통 한 가운데에 또 구멍이 났다. 아까 생긴 구멍에 반쯤 걸쳐있었다. 덕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가늠쇠에 시선을 붙이고 있던 눈이 뻐근했다. 뒤에서 또니가 의례적인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많이 늘었네?" 드럼통 걸레짝 된 거 봐라. 그렇게 말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무게가 절반은 줄었을 드럼통을 발로 깡 소리가 나게 차버렸다. 어디서 뺨 맞고 드럼통한테 성질이에요? 덕개가 괜히 중얼대며 방아쇠의 안전장치를 도로 걸었다. 제대로 걸렸나 확인하기 위해 허공을 겨누어보았다. 총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버릇이었다. 덕개는 걱정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일단 들이박고 보는 성정이었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