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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과] 커튼콜 비록 조잡하고 한심한 연극이었지만, 밤의 지루함을 덜어내기에는 손색이 없었소. _ 셰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 각별은 자신의 삶이 꼭 연극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운명의 힘 앞에 발버둥치다 무력하게 잡아먹히고 마는 그리스 비극.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신의 악의는 믿었다. 여느 신화와 비극들에서 그렇듯이 신은 언제나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얽어놓았다. 하필 덕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수희라는 게, 하필 공룡의 첫사랑이 수희였다는 게, 하필 세준이 죽고 그 자리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라더였다는 게, 하필 수현과 잠뜰이 원하는 것을 가진 게 덕개였다는 게. 거대한 악의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각별은 각본가에게 묻고 싶었다. 왜 신화 속 영웅들처럼 용맹하지도, 의지가 충만..
[하이틴] 명멸 잠뜰TV 하이틴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합작 링크 : highteen.creatorlink.net/ BGM : youtu.be/YFBR0bJTKWw깜빡. 어떤 일들은 정말 난데없이 일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케일이 큰 일일 수록 그렇다. 한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큰일은 정말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고 냅다 내리꽂힌다. 징조가 보임에도 애써 외면한 결과인지도 모르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러나저러나 날벼락이다. 각별의 실종이 그랬다. 각별의 눈 색을 닮은 샛노란 꽃다발이 검은 아스팔트 위로 흩뿌려졌던 게 기억이 났다. 잠뜰아. 혹시 각별이가 갈 만한 곳 모르니. 멍한 머리를 말들이 헤집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단순히 집에 제 시간에 안 들어온 걸로 실종신고를 하기에는 이르지 않느냐고..
From. Underground (5) 5. 불편한 자리(2) 검은색 철제 책상 위에 여러 종류의 종이들이 어지럽게 놓였다. 레쏘의 사진, 거래 장소의 지도, 몰래 찍은 것으로 보이는, 우재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 아니마의 뒷모습. 카메라의 존재를 인식한 것인지, 곁눈질로 쏘아보는 붉은 눈동자가 매서웠다.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카메라 뒤에서 계책을 짜는 이들을 농락하듯이. 알 수 없이 부아가 치밀었다. 얕보이고 있다. 이깟 별종에게, 철저히 얕보이고 있다. 각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해서, 항구에서 곧 거래가 진행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잠뜰이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각별은 간간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뜰의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별종 간부진 둘이 아니마의 조직원으로 위장하여 거래 현장을 가로채고, 훼방을 놓는다. 이 과정에서..
From. Underground (4) 4. 불편한 자리(1) 목을 죈 넥타이를 더 조였다. 셔츠가 불편하게 당겨져 도리어 주름이 졌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손끝이 어떻게든 정리해보려고 애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게 넥타이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 때문인지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머리가 배로 어지러웠다. 그래. 조금 불편한 정도니까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입 열지 않고, 조금만 참으면……. "덕개야. 이리 와봐." 잠뜰이 조수석 등받이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몸을 틀자 벨트가 어깨를 꽉 붙잡았다. 손으로 벨트를 밀어 공간을 내니 잠뜰이 먼저 일어나다시피 해 덕개의 옷깃을 쥐었다. 꽉 조여진 넥타이 매듭을 붙잡아 반쯤 풀고는 우그러진 셔츠끝을 쫙 폈다. 흔들리는 차 안인데도 꽤나 능숙했다. "넥타이 그렇게 ..
From. Underground (3) 3. 피에니타 "발레나 측에서?" 책상 위를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발레나 측에서. 각별이 책상 한쪽으로 밀어둔 서류뭉치 맨 위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냈다. 난잡하지만 확실하게 빨간 선이 그려진 항구 지도와, 아니마의 수장 우재의 사진. 공룡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물품을 약속한 만큼 받지 못해 따지러가면 언제나 그 이름이 나왔다. 아니마. 우재. 갑작스럽게 뭍으로 올라온 조직과 그 수장. 겁도 없이 야금야금 영역을 침범하는 하이에나 같은 것들. "레쏘가 발레나 측에 먼저 정보를 넘기면서 부탁했던 모양이야. 아니마를 정리해달라고." "레쏘가 왜? 그 사람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며." "레쏘의 눈에도 아니마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는 게 보인 거겠지. 조직 간의 균형을 신나게 망가뜨리고 있잖아. ..
From. Underground (2) 2. 발레나 법이 의미를 잃고 밤의 총성이 당연해진 때다. 골목길 구석구석마다 파리가 꼬였다. 굶어죽었는지 맞아죽었는지 알 수 없는 사체들이 하루에 하나면 적은 편이었다. 약과 폭력이 성행하는 밑바닥 끝에, 더 깊은 바닥이 있었다. 맨 아래 깔린 것들은 가장 더러운 것이면서, 위에 쌓인 것들의 근간이었다. 무엇보다 더러운 일에 손을 대며 동시에 고귀하신 윗동네의 뿌리를 쥐고 걸핏하면 흔들어대는 것들. 어중간하게 밟히기보다는 그 발을 쥐고 거래를 걸어오는 것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질척한 것들 중 하나가, 발레나였다. 발레나는 명맥에 맞지 않게 규모가 작았다. 보스 잠뜰을 포함한 단 다섯의 간부진과 그 밑으로 백이 될까말까 한 말단직원들. 딱 그정도. 조직보다는 길거리 갱에 가까운 규모였다. 보스인 ..
[밤을 보는 눈] 데자뷰 그날도 우리는 가라앉았었지 각별은 소위 말하는 죽은 듯이 잠드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의 특수성과 유달리 지치기 쉬운 체질이 공존하는 탓에 한번 잠들면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각별이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거라는 농담을 자주 했다. 그건 집에 불이 난 그 날도 다르지 않았다. 연기 냄새를 맡고 일어난 건 공룡 뿐이었다. 각별은 문틈새로 새어들어오는 연기가 숨통을 막을 때 쯤에야 눈을 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짙은 잿빛의 연기가 목구멍을 태웠다. 각별은 갓 잠에서 깨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정리했다. 몸을 낮추고, 옷소매로 입을 막고, 천천히, 당황하면 산소가 빠르게 고갈되니까. 천천히… 아, 형. 공룡이 다른 방에 있다는 게 생각났다. 잠에 취하는 자신과 달리 ..
From. Underground (1) 1. 밑바닥 세상은 썩었다. 구제의 여지 없이 썩어문드러졌다. 그게 공룡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명분이었다. 경찰은 뒤로 돈을 받아처먹고 죽어가는 사람을 발로 차 숨겨주며, 정치인은 높은 곳의 표를 받기 위해 밑에 있는 사람들을 발로 짓밟는다. 어디서 벽돌이 떨어져 사람 머리가 깨져도, 의사는 돈을 받지 않으면 치료해주지 않는다. 낮은 밤이고 밤은 더 깊은 어둠인 곳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공룡의 익숙한 일장연설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라더는 일어나 무릎을 털고 수현은 하품을 하며 툴툴거렸다. "말 긴 거 봐라. 그래서 남의 집 터는 건 그런 것에 비하면 약과다?" "내 말은 우리가 하는 일까지 그냥 죄라고 뭉뚱그려지면 안된다는 얘기지." "공룡아. 우리 죄 짓는 건 맞아." "그럼 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