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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AYS : 좀비사태] 양자택일 그대는 인간인가? 끄륵, 끄르륵. 벌어진 입술 새로 인간의 것이 아닌 소리가 들렸다. 라더는 그 앞에 대충 구겨앉았다. 총구멍 사이로는 흐르는 게 없었다. 수현의 피는 온기를 받지 못한지 꽤 되어 굳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잠뜰이 그 심장에서 억지로 빼내어 섞은 피가, 수현의 몸에 흘렀던 마지막 온기였다. 라더는 수현의 눈을 감겨주어야하나 고민했다. 이미 무너지고 어질러진 얼굴에 손을 대려니 조금 망설여지기야 했다. 입에서 피가래가 끓었다. "… 왜." 끄륵거리는 소리 위로 작지만 확실히 분간할 수 있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라더는 눈앞에서 손을 멈췄다. 뭐야. 아직 말이 나와? 하는 순수한 의문이 막을 틈 없이 새어나왔다. 수현이 이미 썩어버린 팔을 들어 라더의 손목을 쥐었다. 응어리 진 것들이 주륵 ..
[심판자] 제1법칙 뜰리오트로프의 규칙을 준수하세요. 1. 절대로… 손가락 하나로 선고가 내려진다. 범죄자는 발악하지 않는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증거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말 뿐인 부정은 기록을 이길 수 없다. 몇번씩 잡혀들어온 범죄자의 경우는 더 쉽다. 그들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결코 저 굳게 닫힌 셔터가 도로 열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발 조금이나마 형량을 줄여주십사 애원하는 것 외에는, 그들 입에서 나올 말은 없다. 라더는 감시자가 천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사사로운 사족을 달지 않았으며, 신입 감시자들이 흔히 그러듯 물질에 목을 메지도 않았고, 눈썰미도 좋았다. 실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실적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옆 자리가 ..
From. Underground (15) 15. 난 자리 각별은 태생부터 그 곳에 있었다. 밑바닥 중에서도 가장 위. 물밑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내려다보는 자리. 그런 모순적인 자리에, 각별은 처음부터 발을 딛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검게 물든 하늘을 보며, 제 발밑을 기어다니는 수십, 그 밑에 깔린 수백의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리며, 발밑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 어깨를 붙잡은 손에 기대어 섰다. 손의 주인은 그림자에 묻힌 얼굴로 늘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각별아, 너는 왕이 될 거야." 이 세상은 당연하게도 군주제가 아니다. 절대왕정이라는 구시대적 정치관은 이미 혁명의 붉은 물결에 쓸려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잔재가 하수구 밑에 잠겨 일렁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우물 안에서 그 위가 하늘이라 믿으며 자란 개구리는 그런 것을 모른다. 그저 그 ..
[밤을 보는 눈] 신화는 작별을 고하고 믿을 구석이 필요 없어진 시대에 "벌써 지친 것이냐." 땀과 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이 계속 시야를 가렸다. 갈색으로 흐릿하게 퍼져나간 시야 사이로 푸른 것들이 점멸했다. 잠뜰은 얼굴에 붙어대는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치웠다. 라더가 다시 손끝을 돌렸다. 곳곳에 흩어져있던 물방울들이 다시 한 곳으로 모였다. 검을 고쳐쥐었다. 물기에 손잡이가 계속 미끄러졌다. 악에 받쳐 입을 열었다. 아뇨, 아직입니다. 라더의 입꼬리가 옅게 호선을 그렸다. "오냐, 그럼 어서 덤비거라." 물기둥이 청명한 소리와 함께 솟아올랐다. * 그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기억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믿을 구석이 필요해진 그 순간부터 그는 그 곳에 있었다. 본디 작은 미물이었을지 모르는 그는 그렇게 신이 되었다. ..
From. Underground (14) 14. 별 거 아닌 "생각보다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옛날 친구를 만나서." 도르르륵, 각별이 의자를 돌렸다. 공룡의 얼굴 곳곳에 난 멍과, 누가 봐도 주먹질 한 번 거하게 하고 온 손등의 핏줄. 각별이 우스개소리를 건넸다. 너 레쏘 패고 온 건 아니지. 내가 그렇게 앞뒤 없는 놈으로 보여? 공룡이 화답하며 실없이 웃었다. 치아에 긁힌 입 안쪽이 움직일 때마다 따갑고 아팠다. 각별이 책상 위의 펜을 손끝으로 살짝 세워 돌렸다. "수현이가 뭐래?" "잠뜰이 일을 꾸미고 있어. 대체 뭘 원하고 그러는 지는 모르겠지만." "우재는." "우재는 한동안 조용할 거야. 그 쪽도 머리가 있으면 더 나대지는 못하겠지." 그건 조금 다행이네. 공룡은 책상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올려져있던 종이 몇 장이..
From. Underground (13) 13. 붉은 손(1)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얼룩들이 곳곳에 묻었다. 문질러 지우려고 해도 쉽게 떨어지질 않는 얼룩들에 속에서부터 욕지기가 올라왔다. 귀를 찌르는 총성도, 비명도, 빛이 꺼져가던 눈빛도 아직 생생했다. 3개월. 라더는 아직도 그 3개월 전의 망령에게 발이 묶여있었다. 영문 모를 말을 쏟아내다가 그 질척하고 구역내나는 삶을 멈추고 만 망령에게. 잠뜰은 라더에게 자신의 총을 들려보내며 몇번이고 어깨를 토닥였다. 나도 처음 임무 나갔을 때는 무서웠거든. 그런데 하다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괜찮아질 거라는 의미였지만 라더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너도, 이 밑바닥의 인간이 될 거야. 이 밑바닥에 있는 게 어울리는 인간 말이야. 라더는 인간으로 살고 싶었지만, 그만큼 어..
From. Underground (12) 12. 한 자락 돌아온 덕개를 먼저 맞아준 건 또니였다. 수고했어. 보다는 아직 보스 안 왔는데. 라는 말이 먼저 귀에 들렸다. 또니는 들고 있던 펜을 창틀에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너 데려다주고 오자마자 급하게 나갔어. 이야기할 게 있다고 피에니타 사옥으로 간다던데." 다음 작전 회의 때문 아닐까. 뒤에 작게 덧붙였다. 덕개는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또니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빨간 숫자판이 카운트다운을 하듯 빠르게 줄어들었다. 숫자가 1에 가까워질수록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띵. 청명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끼긱거리며 열렸다. 그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순간 또니가 어깨를 잡아챘다. 잠시 긴장이 풀린 순간을 놓치지 않은 날랜 손길에 몸이 속수무책으로 뒤로 쏟아졌다. ..
[이세계 삼남매] 모순 이미 날아간 화살은 한없이 과녁에 가까워지기만 할 뿐 *교통사고와 죽음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내 손을 벗어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양궁을 시작한 이래 제일 많이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한 발 한 발 신중해라. 이미 쏜 화살에 발목잡혀 다음 것을 놓치지 말아라. 잠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뜰은 제가 이미 쏘아보낸 화살들에게는 아무런 집착도 하지 않았다. 흘러가면 끊어내고 흘러가면 끊어냈다. 잠뜰은, 제가 양궁을 하는 동안 이미 과녁에 꽂혀버린 화살에 집착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행복해?" 잠뜰은 제가 쏘아보낸 화살이 제 손끝은 물론이고 제 친구의 심장마저 꿰뚫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후회했다. 아주 강한 바람이 불어 제가 쏜 화살을 다시..